두산아트랩 <원의 안과 밖:탄생비화> 관람 후기
삼일절 백주년 기념으로 떠들썩한 2019년 3월 1일, 나는 당직을 섰다. 출근하자마자 철문을 열고, 건물로 올라가 전시실의 보안을 해제했다. 삼일절이라 그런지,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 많았다. 미리 예약한 단체 방문 세 팀 외에도, 외국인 관광객 등 단체 관람이 꽤 많았다. 경비실 안에 앉아있다가 방문객이 오면 방문 정보를 접수하고 기본적인 설명과 함께 관람 동선을 안내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점심엔 경비실 안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퇴근하면서 함께 당직을 섰던 선배가 건물에 남아있는 방문객이 없는 지, 조명이 켜져있진 않은 지 돌아다니며 점검하고 문을 잠갔다. 아직 바깥의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아 꽤 밝았지만, 불 꺼진 복도는 어두컴컴했다.
철문을 닫고 퇴근하는데, 문득 어제 본 연극 <원의 안과 밖:탄생비화>(이하 <원>)가 떠올랐다. <원>은 두산아트센터에서 진행한 두산아트랩의 연극이다. 원지영 씨가 연출과 극본, 딸 역할의 배우를 맡았고 원지영 씨의 친아버지인 원세종 씨가 아버지 역할의 배우를 연기했다. 딸과 아버지가 연기하는, 딸과 아버지의 이야기였다.
연극은 오랫동안 해외에서 연극을 공부하고 온 딸이 바리바리 짐을 들고 경비원인 아버지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면서, "많이 기다렸지?" 하고 따뜻하기도, 다소 사무적이기도 한 물음을 건넨다. "괜찮아요." 딸도 사무적으로 대답을 잇는다.
아버지는 두산아트센터의 경비원이다. 관객들은 무대가 아니라 두산아트센터의 로비에서 아버지를 맞고, 또 아버지가 경비원으로 순찰하는 동선을 따라 함께 이동하며 연극을 관람한다. 딸과 아버지가 나누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무뚝뚝하지만 재밌다. 로비에서 딸과 재회한 아버지는 딸을 귀빈 접객실로 데려갔다가, 소극장으로 내려가 문을 잠그고, 티켓박스 앞을 순찰한다. 그리곤 대극장으로 이어지는 기계실로 갔다가, 불 꺼진 연습실을 지나,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경비원 휴게실에 다다라서는 잠시 쉬어간다.
딸은 아홉 살 때 가족에게서 홀연히 사라져버린 아버지에게 그일을 물으려 하나 결국 묻지 못한다. 아버지와 딸은 서로 겉을 맴도는 대화를 나누며 별 얘기 하지 않았는데도, 극장의 안과 밖을 돌다가 이윽고 극장 무대 위에 올라 선 순간, 서로의 안으로 - 마음 속으로 순식간에 들어가 버린다. 마지막 씬에서 극장 무대의 중앙에 선 아버지는 딸의 이름을 부르며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천천히 휘두른다.
<원>에서 아버지 역할의 직업은 경비원이고, 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 원세종 씨의 직업 역시 경비원이다. 또한 귀국한 딸이 한국에 와서 맡았던 일도 (일종의) 경비였다. 원지영 씨는 손전등을 든 채 불 꺼진 남산창작센터를 순찰하고 마지막으로 문을 잠그면서, 아파트의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아버지가 떠올랐다고 했다.
경비는 어떤 노동일까. <원>의 연극에 참여하면서, 아버지와 딸, 관객 모두 손에 하나씩 손전등을 쥐고 걷는다. 자신의 발 밑을 보기도 하고, 상대의 길을 비춰주기도 하며, 때로는 상대의 얼굴을 향해 들기도 한다. 아버지는 아트센터 곳곳에 자신의 물건을 두었다. 대극장 뒷편 기계실에는 딸에게 줄 연극 잡지를 몰래 숨겨뒀고, 야외 자갈밭에는 상사꽃을 심어놨다. 연습실에서는 요가 매트를 둘둘 말아 경비실로 갖고 온다.(물론 주인과는 협의가 됐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두산아트센터의 '외부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 공간은 그의 돌봄을 받아 곳곳이 풍성하게 사랑받고 있었고, 그만큼 자신의 지분을 비공식적으로 아버지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공간을 묵묵히 지키는 일인 줄로만 알았던 경비는, 실은 그 공간이 상하지 않도록 살뜰하게 보살피고 챙겨주는 돌봄의 노동이었다.
딸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이중적인 감정을 느낀다. 딸은 경비원 휴게실에서 나오다가 아버지보다 밖으로 먼저 나와 문을 쾅 닫아버린다. 아버지는 문을 쾅쾅 두드리며 문을 열어달라고 외치지만, 딸은 장난스럽게, 그러나 진지한 표정으로 문고리를 잡은 채 놔주지 않는다. 문 저편에 아버지를 둔 채, 딸은 묻는다. "그때 대체 어디에 있었어요?"
자신의 일터를 살뜰히 돌보면서도 가족은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 딸과 아버지는 모두 연극 무대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랑한다. 그들의 사랑이 닿는 장소는 같지만, 그들의 사랑은 서로를 마주보지 못한다. 딸은 마지막 씬에서 조명실에 올라가 아버지에게 빛을 비춘다. 아버지는 무대에게 딸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지만, 조명이 너무 밝아 딸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대면해야만, 혹은 꼭 "그때 어디에 있었단다"하고 그날의 이야기를 풀어야만 모든 갈등이 풀리는 건 아니라는 듯이, 딸과 아버지 사이를 웃도는 긴장은 슬그머니 사라져버린다. 불 꺼진 연극 무대에 들어가면 안된다고 했는데도, 딸의 재촉에 결국 무대로 올라가는 문을 연 순간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극장의 안과 밖을 헤매다가, 이윽고 무대에 선 배우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독백한다. "1984년 11월 17일, 딸이 태어났을 때를 기억합니다.(...) 원지영, 내가 가는 길을 비추는 빛."
경비원이 비추는 손전등은 자신의 길을 비추는 빛이자, 그가 돌보는 대상들을 살피는 빛이다. 손전등은 기본적으로 먼 곳까지 밝게 비추진 못한다. 자신이 걷는 1미터 안팎의 길만 비출 뿐이다. 눈앞의 대상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광원도 아니다. 손전등은 테두리부터 안쪽까지, 안쪽에서 다시 바깥으로, 전체를 보기보다 부분과 부분을 살피면서 동그랗게 그리면서 관찰하는 빛이다. 아버지와 딸은 딱 그렇게, 손전등만한 대화를 사용해 서로를 살핀다. 안쪽에서 바깥으로, 바깥에서 안쪽으로 오가며 대화를 나누다가 이윽고 중심으로 갑작스럽게 텅 들어와버린다(손전등이 아니라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그를 비추는 것처럼).
그들이 나눈 손전등 대화는, 어떤 걸 비추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넓고 추상적인 의미의 가족, 사랑, 의무, 책임같은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느껴지기에는, "용서는 몰라요. 일단 지금은 화해합시다." 정도의 뉘앙스로, 눈 앞에 있는 아버지에게 건네는 아주 구체적인 화해의 손길 정도였달까. 전체적으로, 정말 사랑스러운 연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