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과 통화하면서 강아지를 입양한 사실과 동시에 강아지가 임신인 것 같다고 알렸다. 재미난 소식이라고 생각해서 알려드린 건데, 선생님은 입양한 지 일주일 된 강아지가 임신했다는 걸 받아들이는 내 모습이 담담하다고 놀라워했다. 강아지가 임신을 했다는 말은 임신부터 출산까지, 그리고 몇 마리가 나올지 모를 새끼들도 입양 갈 때까지 책임감이 몇 배가 될 지모르는 일이다. 나는 단순하게 위에 나열한 일들을 책임져야 하는구나, 그럼 뭘 먼저 해야 되나 검색을 했을 뿐, 그에 대한 복잡한 고민들은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아마 내가 이미 벌어진 일은 그냥 그렇구나 하고 단순한 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한 번도 깨닫지 못한 나의 모습이었다.
강아지를 키우면서 내가 제일 무서운 건 강아지가 죽고 난 다음의 슬픔이다. 강아지는 별일 없으면 나보다 먼저 죽으니까, 그 상실의 고통과 슬픔의 시간이 있을 걸 미리 알면서 강아지를 키운다는 게 무서웠다. 선생님은 강아지가 저보다 먼저 죽으니까 무서워서 못 키우겠다는 말에 내가 과연 큰 상실을 겪어 본 적이 있나 물었다. 이미 크게 데어봐서 무서운 게 아닐까 생각하셨나 보다. 내가 겪어본 상실이라면 연인과의 헤어짐이나 좋아하던 단짝 친구와의 절교 정도다. 아니, 내가 정말로 무서워하는 큰 상실들은 아직 닥치지 않았다. 형체도 실체도 없이 상상으로 키운 상실의 고통에 나는 매우 자주 무서워한다. 강아지를 입양하고 밤에 자다 깨서 강아지가 잘 숨 쉬고 있는지 확인하고 잠이 든 날이 여러 밤이다. 어릴 때 할머니가 시장에서 사 온 까만 금붕어를 보면서, "얘넨 어차피 빨리 죽으니까 차라리 정들기 전에 빨리 죽어버리면 좋겠어."라고 말한 서늘한 나의 마음이 기억난다. 7살이 된 어린아이 때부터 같이 자라난 불안은 정말 어디서 온 걸까? 정들고 떠나면 어린 마음에 어디서 겪어본 건지 어떻게 참 아팠던 건지 기억은 안 난다. 그 금붕어는 그리고 3일도 안돼서 물 위로 배부터 떠 죽어버렸다.
강아지로 시작된 상실과 불안의 이야기는 어린 나로 돌아갔다가 내 인간관계까지 다시 돌아온다. 처음 상담은 인간관계가 고민이라 시작했는데 점점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인지 알아가는 시간이 되고 있다. 내 인간관계로 비롯된 집착과 우울 뒤에는 불안이라는 감정이 숨어있다. 나는 불안이 많고 불안은 특히 내가 아끼는 사람이나 관계가 내 의지와 관계없이 상실이 일어나는 데 집중되어 있다. 내 마음이 울타리고 그 안에 꽃으로 피어나는 게 내가 맺고 사는 관계들이라면 나는 꽃들이 시들지 않도록 정성을 다한다. 하나하나 소중하게 심어 놓은 거라 나는 그 꽃들이 내 울타리 밖으로 떠나는 게 죽어도 싫은 거다. 내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서 내가 정성을 다해도 꽃은 시들게 마련이다. 꽃을 가만히 감상해도 시간이 지나면 꽃은 지기 마련인데, 정성을 다한다며 사실 괴롭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꽃이 얼마나 이쁜지는 보지 못하고 꽃을 어떻게 하면 오래 볼지, 앞으로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볼 수 있는지에 지금 내가 너를 보고 있다는 사실은 사라진다. 1주일을 같이 지내는 강아지는 관찰하는 순간순간마다 웃게 된다. 그동안 고민하던 시간이 무색하게 하루 종일 강아지 이야기와 강아지를 귀여워하다가 잠이 든다. 앞으로 올 불안함은 여전히 무서운데, 이렇게 웃고 같이 행복할 수 있구나 라며 매일 감탄하게 된다. 어쩜 저렇게 눈앞에 현재에 충실할까. 내가 과연 강아지도 사라질까 전정 긍긍하지 않고 우리 지금은 서로 같이 가고 있구나, 너는 이런 강아지구나 강아지의 모습을 그대로 봐줄 수 있을까? 이십 년 동안 나와 함께 자란 무서움보다 큰 용기가 어디서 나와서 강아지를 데리고 온 걸까. 그 용기가 어디서 오게 되었는지는 스스로도 공부 중이다.
강아지 임신과 증상을 검색하면서 강아지도 상상임신을 한다는 걸 알았다. 청진기랑 손으로 강아지를 관찰한 의사 선생님도 뱃속에 뭔가 있는 것 같지만 초음파를 해야 확실히 알 수 있다고 하신다. 강아지는 선생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귀를 뿡 뀌어버렸다. 1인 1개 샌프란시스코에는 동물병원도 예약이 힘들어서 다음 주 목요일에 드디어 초음파를 예약했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나는 아직 상상임신일 거라고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