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1권만 2016년에 읽었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홀로 읽고 싶은 메타포 연재의 마지막이 <리스본행 야간열차>이다. 읽어야 하는데... 607페이지 중 148페이지까지 읽은 참이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본명은 페터 비에리이다. 소설을 집필할 때는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을 사용한다고 한다.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과 루이 세바스티앙 메르시에의 이름을 조합한 것이라 한다. 실제로 그는 철학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작품에서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와 레이랜드 재미없는 남자주인공이지만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1. 리스본행 야간열차
(뚜렷하지 않은 심연)
인간 행위의 표면 아래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
아니면 인간은 자신이 만천하에 드러내는 행동과 완벽하게 일치할까?
아주 이상하게 들리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도시와 테주 강을 비추는 햇빛처럼 내 마음속에서 늘 변한다.
뚜렷하고 예리한 그림자를 만드는, 반짝이는 8월의 매력적인 햇빛은 인간에게 숨겨진 심연이 있다는 나의 생각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느끼게 한다.
신기루와 비슷한, 햇빛에 반짝이는 물결을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면 나타나는 진기 하면서도 약간은 감동적인 환상처럼.
그러나 흐린 1월에 도시와 강이 그림자도 없는 희미한 빛과 지루한 잿빛 지붕에 덮이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알 수 없는 심연에 숨겨진 내적인 삶이 겉으로 드러내는 표현, 그것도 심연에는 전혀 가깝지 않으며 아주 불완전하고 거의 우스꽝스러우리만큼 약한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이렇듯 기이하고 걱정스러운 내 판단의 불확실성에 더하여 내 삶을 계속 당혹스럽고 뒤숭숭하게 하는 경험도 존재한다.
나 자신에 관한 일인 경우에도, 그러니까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의 일에서도 다른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즐겨 찾는 카페에 앉아 햇빛을 쬐면서 지나가는 여성들의 방울 소리 같은 웃음을 듣고 있노라면 내 모든 내면세계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충만하게 차오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내면세계는 이렇듯 편안한 느낌에 푹 젖어 점점 더 뚜렷해진다.
그러나 마법과 꿈을 깨뜨리는 구름이 햇빛을 가리면, 내가 모르는 일들을 불러일으키고 나를 휩쓸어갈 수 있는 감추어진 심연과 나락이 내 안에 있음을 갑자기 확연하게 느끼게 된다.
그러면 나는 해가 얼른 다시 나와서 표면화된 안온함에 타당성을 부여해 주길 기대하면서, 급하게 계산을 하고 기분을 전환해 줄 소일거리를 찾아 허겁지겁 나선다.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p40-41
#2. 언어의 무게
집 전체가 고요했다.
자신의 존재로 공간을 가득 채우던 사람이 자리를 비웠을 때 드러나는 고요함이었다.
이 고요함은 또한 적막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가장자리가 바랜 지도는 유물처럼 보였다.
앞으로 삼촌과 함께 여기 서서 어떤 언어가 빠졌는지 세어볼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걸까? 아니면 지도가 조용하고 적막한 이유는 -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 예상치 못한 새로운 시간에 더는 어울리는 장소가 없기 때문이기도 할까?
파스칼 메르시어 <언어의 무게> p18
#3.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철학이 생겨난 뒤로 서양의 전 역사에 걸쳐 흐르는 반철학적 문학 전통을 나는 사색적 수사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전통의 이론이 로마에 도래한 시기를 139년으로 꼽는다. 그 이론가는 프론토였다.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 : 1~2세기 로마의 문법학자, 수사학자
우리 안의 무언가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 무언가가 배출구를 찾고 있다.
*
바다 물결의 출렁임 속에 바다가 아닌 다른 무엇이 나아간다. 나뭇잎들의 떨림 속에서 바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떨린다. 우리가 사랑하는 살아 있는 여성의 눈빛 속에서 전등 불빛이나 햇빛의 반사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반짝인다. 꽃들의 개화 속에서 꽃들이 알지 못하는 미래의 어느 계절에 번식을 시작할 번식 기관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꽃피고, 그 사이 꽃들은 스스로 열리고 색색으로 물든다.
죽은 사람들이 지은 책들 속에 매복하고 있는 건 무시무시한 유령들이 아니라,말로 표현할 길 없이 생기발랄한 특징을 띠고 기쁨과 고통 사이에서 삶의 경계선에 자리한 채 끝나지 않고 끈질기게 버티고 나아가고 뻗고 호소하는 부활이다. 심연의 낭떠러지는 산자에게 그저 사는 방식으로, 예측 불가능한 징후로 닥친다. 의도적인 작업 방식이나 예술로서 닥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잔인한 부름 가운데 불안정한 물질성에 따라, 그보다 더 불안정한 정체성의 형태를 취하고 존재하는데, 그 잔인한 부름은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포유류들의 울부짖는 출생보다 훨씬 격렬한 무언가)와 더더욱 형용할 수 없는 파괴성(사망률 하나만으로도 포섭 불가능한 파괴성)을 드러낸다. 단지 빵 껍질의 균열만 맹수들의 벌린 아가리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마르쿠스의 또 다른 아이콘은 땅보다 앞서 시간의 바닥에서 올라와 몰아치고, 모래사장 위로 일어서고, 이미 물러나고 있는 파도 위로 부서지는 파도들을 턱뼈라고 주장한다.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_프론토(p69-70)
*
바다에서 출렁이는 파도의 움직임에서 우리는 어떤 항적도 식별하지 못한다.
밀물은 어떤 부름에 응하는 걸까? 학살은 어떤 부름에? 밤과 낮동안 태양이 그리는 도정은 어떤 부름에? 전염병은 어떤 부름에? 신은 어떤 부름에 응하는 걸까? 떨어지는 과일은 어떤 부름에? 가을은? 봄은? 여름은? 세월은 어떤 부름에 응하는 걸까? 노화는 어떤 부름에 응할까? 강은 어떤 부름에 응할까? 동굴의 침묵은 어떤 부름에 응할까?
*
제기될 수 있는 온갖 의문이 별안간 입술의 늘어진 살처럼 일그러지며 단 하나의 물음임이 드러난. 그 모든 의문이 제기되면서 이렇게 묻는다. 언어는 어떤 부름에 응하는 걸까?
맹수의 입술 위로 이빨 하나가 삐져나오듯이 불쑥 튀어나온 이 유일한 의문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진술이 짐작하게 하는 것과는 달리 수수께끼는 하나가 아니다. 사회들의 분열과 언어의 다양성은 어떤 부름에 응답하는 걸까? 문헌학자들은 인간이 말을 하게 된 이후로 인간의 언어가 만 천 개가 넘는 것으로 파악했다.
언어들은 어떤 부름에 응답할까?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_프론토(p73)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은 한 권의 분량이 168page인데 이번에 2번째 읽고 있다. 음... 처음에는 이해하려고 읽다가 그냥 눈으로 따라 읽었다. 그러다 묘한 매력을 느꼈는데... 내용은 사실 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여러 가지 글로서 이미지를 만드는 일, 연상하게 하는 일 그런 가능성을 일으켜주는 일 그래서 다시 읽으면서 그런 일들을 반복했다.
유튜브에서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자기 계발서 같은 책을 만드는 사람이 유용한 팁을 얘기해 주던걸 보았는데... 다른 책을 펼치고 다시 자신의 글로 돌아와 그 느낌을 가지고 와 나의 글을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 그 이야기가 무언 지는 언 듯 알 것도 같았다. 그 느낌만 가져온다는 것.
요즘은 다양한 채널이 많고 내가 쓰고자 하는 게 글이 든, 그림이든, 영상이든,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새로운 것보다는 내 개성으로 살짝 비튼 새롭게 만드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 시도는 누구나 하지만... 완성(완결) 짓는 일은 역시나 어렵다는 것.
배워가면서 글쓰기 하고 있다. (즐기면서 하고 싶지만...) 즐기면서 하고 싶다. 그리고 더운 여름 책도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