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일기 서른다섯 번째
세상에. 후추가 우리 가족이 된 지 꼭 1년 되는 날이다. 축하!!!
최근 (슬픈 일이 많기도 했지만)이렇게 감격스러운 날이 있었나 싶다. 나는 진작에 이 날을 '가족기념일'로 부르고 있었다. 우리가 한집에 사는 가족이 된 날. 이렇게 해서 나에게 소중한 기념일이 또 하나 생겼어. 주어진 기념일 말고 내 선택으로 만든 기념일은 어쩐지 더 각별하다. 심지어 가족이라니. 우리는 이제 꽤 잘 맞는 세 가족이 된 듯하다. 서로의 현재 상태와 생활 방식을 대부분 이해하고, 맞춰준다. 서로를 이해하는 데 보낸 시간들이 있었고, 꼭 필요했던 그 시간이 차곡차곡 쌓였다는 증거를 확인하는 게 이 시절 나의 큰 즐거움이다.
요즘 후추에게 가장 고마운 것은 저녁 식사 시간을 보내는 일련의 흐름이다. 후추에 비해 다소 긴 우리의 저녁 식사. 후추는 우리 곁에 의젓하게 앉아 식사가 끝나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준다(물론 중간 중간 간식을 빙자한 사료를 대접해드리긴 한다). 마침내 인간들이 밥을 다 먹은 것 같으면 재빨리 눈빛을 쏟아낸다. 많이 기다렸으니 이제 놀자고. 후추와의 1년 생활을 돌아보면 많은 것이 뜻깊고 새삼스럽지만 역시 번번이 감동하는 것이 이런 것이다. 나는 후추가 만드는 몸의 언어가 매번 놀랍다. 그 확실한 의사 표현이라니! 그건 거의 말풍선처럼 눈에 보일 지경이다. 강아지와 사는 일이 일상의 마법을 실감하는 일이라는 걸 1년 전의 나는 몰랐다. 마법처럼 기다려준 후추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기쁘게 놀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공놀이도 하고, 산책도 하고, 실컷 장난도 친다. 이렇게 1년의 시간이 느슨한 약속으로, 굳건한 믿음으로, 따뜻한 사랑으로 쌓였다. 후추는 이제 전에는 가지 않던 책상 밑 공간에도 거리낌 없이 간다. 집안 곳곳을 자신이 챙기겠다는 듯 늘상 열심이다. 조심성 많은 후추가 이 공간을 완전히 자신의 공간으로 받아들이게 됐다는 점 역시 지난 1년, 가장 감사한 변화다.
그런 후추의 웃긴 점은 리터럴리(!) 이 집을 자기가 지키려고 한다는 점이다. 집 밖에서는 단 한번도 짖은 적이 없는 후추가 거의 유일하게 짖을 때가 있다. 바로 초인종이 울릴 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외부인의 방문이 많지 않은 우리집은 초인종 울릴 일이 거의 없다. 아니, 그래도 후추야, 가끔 배달은 시켜 먹을 수 있잖아... 얘는 심지어 내가 외출에서 돌아올 때도 짖는다. 흐음. 현관의 기척이 후추에게는 경계의 신호인 걸까? 나는 의연하고 믿음직스런 태도(라고 믿는다)로 "후추, 괜찮아, 집은 내가 지킬게"라고 말하며 손바닥을 보여주지만 그게 먹힐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창밖에 지나가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산책하는 강아지들, 자전거 타는 어린이들,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고양이들. 후추는 그런 움직임에 일일이 반응한다. 다행히 이들이 '내 집' 근처를 지나갈 뿐 집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는 더 이상 그들을 향해 짖지는 않는다. 등의 털을 슬며시 세우긴 하지만. 나는 그 옆에서 "너는 안전해, 후추야.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야. 우리는 여기 있잖아. 안녕하세요, 해봐. 우리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말고."라고 종알종알 얘기한다. 왠지 알아듣는 것 같아서.
며칠 전에는 밤에 시작한 비가 새벽까지 내렸다. 빗소리의 낭만을 누리기에 후추는 아직 지키고 싶은 게 많은 한 살 강아지. 함께 잠자리에 누운 참인데 어쩐지 자꾸 일어나서 바깥을 살피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저건 비잖아, 그냥 비가 내릴 뿐이야, 우리는 안전해, 너는 집 안 지켜도 돼, 아무리 안심을 시켜도 몇 번을 내 옆에 누웠다가 다시 나가서 방범을 섰다. 아, 나는 갑자기 그 모습이 짠하고 고마워서 물기가 많은 이상한 웃음이 났다. 그 새벽에, 어떻게 하면 후추를 안심시킬 수 있을지, 어쩜 얘는 이렇게 충실한 존재인지를 생각하다가 후추를 우리에게 보내준 어떤 운명의 존재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건네면서 그랬다. 지키고 싶은 게 생긴 후추. 나는 그게 다름 아닌 우리의 공간이라는 게 기쁘고 기적처럼 여겨져서 내 옆에 다시 누운 후추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오늘, 1년 전 후추의 사진을 꺼내보았다. 그 모습이 기억보다 훨씬 더 어리고 용감해서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익숙한 것이라고는 자신이 쓰던 방석과 작은 장난감 정도였을 텐데 낯선 집안을 씩씩하게 살피던 그때의 후추가 생각났다. 아직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고도 꽁지를 내리는 후추에게 웃으며 겁쟁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사실 나는 후추만큼의 용기를 보지 못했다. 완전히 낯선 세계에 홀로 떨어져 그곳을 1년 만에 자신의 보금자리로 만들어버리는 용기는 누구나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곳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그 사랑과 용기를 지키려고 매일 노력하는 마음을 누가 따라할 수 있을까. 지난 1년. 나에게 '후추'는 용기라는 이름과 다름 아니었고, 그러니까 오늘은 가족기념일인 동시에 '용기의 날'이기도 한 것이다.
3월 27일, 용기의 날. 덕분에 나도 조금 더 용기를 내는 방향으로 이 시절을 씩씩하게 걸어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