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일기 서른여덟 번째
한참 후추가 많이 피곤했다.
밤마다 잠을 설치기 때문이었는데, 이건 사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성인 두 명이면 꽉 차는 침대에 7kg(가 넘을지도...) 강아지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한 자리를 차지하고 눕는 탓이지. 처음엔 이렇지 않았다. 침대 옆에 마련된 저만의 자리가 있었고, 작고 어린 강아지 후추는 그 자리를 순순히 제 것으로 받아들였다. 푹신하고 안락한 방석에 누워 뒹굴뒹굴 자세를 바꿔가며 자던 시절은 정말이지... 귀여웠다. 그러다 후추는 자신의 능력치가 올라갔음을 깨닫게 된다. 침대며 소파 등에 훌쩍 뛰어오를 수 있게 되자 더 이상 따로 자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잘 시간이 되면 누구보다 먼저 침대로 폴짝 올라가 모로 누워 크게 한숨을 쉬어버리는 태평함을, 때로는 내 옆에 몸을 착 기대고 누운 모습을 보는 것이 그저 행복해서 그대로 자기로 한 지 어언 수개월...
결론적으로 인간 두 명과 강아지 한 마리는 심각한 수면질의 저하를 경험하게 된다. 불행 중 다행은 두 명의 인간 중 한 명은 베개에 머리가 닿으면 곧장 잠에 빠지는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그런 남편은 아침에 잠에서 깰 때까지 드물게 한두 번 깨는 것 외에는 잘 잔다. 다행 중 불행은 쉽게 잠에서 깨곤 하는 나다. 침대를 함께 쓰기 전에도 후추가 꿈을 꾸며 낑낑 짖는 소리, 갑자기 일어나 돌아다니는 소리, 오줌을 싸거나 물을 먹고 자리로 돌아오는 소리에도 쉽사리 깨던 나는 잠결에 뒤척이다가도 후추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서 움직임을 멈추고 신경 쓰느라 잠에서 화라락 깨기 일쑤였다. 아침은 몽롱했고, 구내염도 쉽게 생겼다. 전형적인 피로 증상들이 계속됐다.
후추도 마찬가지였다. 짧은 산책에도 금방 지쳐 긴 낮잠을 잤고, 왠지 입맛도 더 까다로워지는 것 같다. 위기감을 느낀 나는 정력적으로 '패밀리침대'를 검색했다. 우리의 답은 넓은 잠자리다! 그러면서도 심한 내적갈등에 빠진 것은 1) 지금 사용하고 있는 우리 침대가 아직 쓸만 하다는 점, 2) 마음에 드는 패밀리침대가 너무 비싸다는 점, 3) 후추와 사는 생활과 무관하게, 최근 몇 년간 미약하게나마 노력하려 하는 나만의 활동, 즉 '소비 줄이기'와 '소비 하기 전에 그 소비로 발생할 쓰레기를 반드시 생각하는 것'에 크게 반대되는 선택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인내와 희망 섞인 시간을 보낸 뒤 나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가장 최후의 선택지를 택하자고 선언했다. 따로 자야겠다고.
우리 부부의 각방 생활이 그렇게 시작됐다. 셋 모두의 청정한 수면 환경을 위해 잠자리를 분리하기로 한 것이다. 섭섭함이 무색하게 좋은 잠이 우리를 찾아왔다. 어느 날은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에 눈을 떠서 정말로 깜짝 놀랐다. 이런 날이 오는구나. 역시 각방이 답이었나. 헛웃음이 나왔다.
사실 이 각방 생활은 결혼 12년차인 우리 부부에게는 전에 없던 일이다. 각방 생활이 계속되자 편한 한편으로 어쩐지 서로에게 조금 소원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사실 내 경우, 내가 어디에서 자든 후추는 내 옆을 자신의 잠자리로 지정하기 때문에 각방을 쓴다 해도 후추의 온기를 느끼며, 정서적인 안정감까지 어느 정도는 충족할 수 있었지만 남편은 갑자기 시작된 독방 신세(?)가 몹시 쓸쓸했던 모양이다. 후추와 다정한 나를 보며 서운해하기도 하고, 후추와 나의 잠자리에 끼어들려는 터무니 없게 웃픈 시도도 했다.
역시 어쩔 수 없이 다시 패밀리침대 쪽인가 싶어질 무렵 한 사람, 두 고양이와 함께 사는 친구에게 깜짝 놀랄 팁을 들었다. 아기침대를 두면 어떻겠느냐는 것! 와, 이거 정말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속이 뻥 뚫리는 생각이다. 왜 이 생각을 진작에 하지 않았을까, 나는 개안한 듯 즉시 중고 아기침대를 검색했다. 검색에서 거래까지 딱 사흘이 걸렸다. 우리 침대와 높이가 딱 맞고 깨끗한, 후추의 몸 크기에 딱 맞으면서 가격도 저렴한 아기침대를 들이면서 나는 무적의 기분을 느꼈다. 흐흐, 후추야, 우리 이제 셋 다 편하게 잘 수 있어, 이제부터 다같이 꿀잠 자자...!....!????
겁쟁이에다 뭐든 의심부터 하고 보는 후추는 그 침대에서 자기를 거부했다. 그동안 후추가 쓰던 침구를 일부러 빨지도 않고 올려두고, 한껏 누운 상태에서 내 한쪽 팔을 그 침대에 올려 편안한 척을 하고, 그 위에 후추가 가장 좋아하는 인형을 던져서 물고 오기 놀이를 해도 잠시뿐. 얘는 그곳에서 결코 잠만큼은 자지 않겠다고, 어느 날은 그 침대에 스핑크스처럼 앉아서 우리가 비몽사몽 잠이 들 때까지 기다리더니 끝내 좁은 침대로 넘어오고 말았다. 하지만 쉽게 포기할 수 없지. 내 평생 필요한 살림 목록에 한 번도 든 적 없는 아기침대를 집에 들인 이상 그 물건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물론 진정한 의미의 제 기능은 아니지만) 연습, 또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마음으로 몇 주간의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드라마는 이 글의 첫 장면으로 돌아간다.
한참 후추가 많이 피곤했다.
우리는 지금 다시 각방 생활 중이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자 아무리 연습이기로서니 좁은 침대에서 셋이 부대끼며 자다가 어느 날은 이불을 박차고 나와 혼자 바닥에서 자고 싶어질 정도로 한참을 잠에 들지 못했다. 이럴 거면 침대에 나란히 놓인 아기침대에서 차라리 내가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걸 어쩌나, 아, 몰라, 일단 잠부터 제대로 좀 자고 생각하자. 나는 구매한 지 5-6개월이 지나서야 그동안 애태우며 연습한 게 무색하게 훌쩍 사용을 해버린 후추의 계단을 기억하며 언젠가는 이 침대도 후추가 기꺼이 사용할 날이 오리라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믿기로 했다. 지금 우리는 셋 다 쾌적하다. 어쩐지 각방-합방-다시 각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간을 거치면서 더욱 이 상태에 만족하게 된 것도 같지만... 그럼에도, 그래도 아기침대를 기쁘게 활용할 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