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박하고도 Jul 10. 2018

D+18. 내 여행기 듣고 내가 여행 뽐뿌 온다.

여행 계획 있는 사람들 다 부러워.

written by 집순이


D+18.

오늘은 여행 뽐뿌가 많이 온다. 왜냐하면 낮에 지인 만나고 오후에 또 다른 지인을 만나면서 총 6시간 동안 여행 얘기를 했기 때문. 한국 오고 나선 아무리 남편과 여행 얘기를 많이 해도 6시간 떠들 일이 없었는데, 심지어 낮에 했던 얘기를 오후에 아주 똑같이 했는데도 나는 그게 하나도 질리지 않더라. 말하는 도중에도 자꾸 찾아오는 여행 뽐뿌. 만나야 되는 사람들 이제 거의 다 만났으니 당분간 여행 얘기는 자제하며 살 수 있겠지. 절제가 필요해, 나를 위해.

낮에 만난 애는 다다음주에 무려 알래스카로 여행 간다고 했다. 와. 알래스카는 일 년 동안 살아보고 싶은 나라다(한 번도 안 가봄). 나는 네가 심히 부럽다고 말했다. "세계 여행 끝난 지 2주밖에 안 되셨잖아요" 말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니. 지금 당장 여행 계획 잡혀있는 사람이 최고지. 지나간 건 지나간 거다. 그렇지 않니.


D+19.

월드컵 16강 리스트를 눈으로 훑기만 해도 흐뭇하다. 누구를 응원한담.

이 나라를 응원하면 저 나라가 눈에 밟히고 또 저 나라도 밟히고, 아니, 나는 저 나라도 이뻐하는데 어떻게 한 놈만 응원하라는 거냐. 월드컵이 잘못했네.

남편은 우리가 딱 하룻밤 자고 온 벨기에가 우승할 것 같단다. 걔는 그중 제일 덜 예뻐하는 앤데.. 안 되는데.


벨기에 브뤼셀의 그랑플라스 광장. 유럽 광장에선 무조건 땅바닥에 털푸덕 앉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하던 때.(여기에 나 있다)


D+21

벌써 D+21.

집에 있을 때 전혀 규칙적이고 성실한 스타일 아니었는데 요즘 밤 11시만 되면 잠자리에 눕고 아침 7시 30분이 되면 눈이 자동으로 떠지고 9시 전에 조식 먹고('아침밥' 아니다. 아직까진 '조식'이라는 단어를 내려놓을 수가 없음) 샤워를 끝낸 다음 그 자리에서 바로 손으로 속옷을 비벼 빨아 건조대에 널어놓는다. 일 년 동안 모든 옷들을 손빨래했더니 습관이 돼버렸네. 군대 갓 제대한 애들이 집에서 (잠깐) 이런다지?.....

점심 먹고 잠이 막 쏟아져도 절대 낮잠을 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아직까진 팽배하다. "여행 와서 자기만 할 거야?" 호통 치던 남편의 목소리, 꾸물꾸물 일어나서 샤워하기 귀찮다고 말하던 내 모습이 생생해.

지금은 낮에 뭐라도 하려고 한다. 아깐 책 빌리려고 도서관에 버스 타고 갔다가(총 30분) 걸어서(총 1시간) 돌아왔다. 비가 주룩주룩 내렸는데 그건 또 그것대로 좋았다.

도서관 근처 우이동, 쌍문동은 꽤 자주 가 본 동네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처음 가 보는 길을 선택했고 있는 줄도 몰랐던 재래시장의 한복판을 걸으며 구경했다. 아기둥지라는 어린이집 이름이 예뻐 한참 쳐다보고, 이런 말 미안하지만 '역시 나는 잘 사는 동네 풍경엔 감흥이 없더라. 나는 재래시장 있는 동네랑 어울리지' 생각했다.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의 어린 나이 때 시흥시의 외곽 동네에 살았는데 집 근처에 좁고 빠르게 흐르는 하천과 빨래터가 있었다. 그 빨래터에서 친구랑 소꿉장난 하다가 장난감이 하천에 두둥실 떠내려갔던 게 기억난다.

초등학생 4~5학년 때 다녔던 안산의 초등학교에서는 토요일마다 책가방 대신 보자기에 책을 넣고 등교하게 했다. 등 뒤에서 보자기가 덜거덕덜거덕 소리를 낼 때마다 가슴팍에 사선으로 묶은 보자기 끈을 세차게 다시 한번 묶곤 했다. 우리 반은 가끔 다 같이 근처 동산에 올라가서 쑥과 달래를 캤다. 엄마가 정말 좋아했지. 알지도 못 하는 사람들 무덤가에서 캐 온 달래로 끓인 된장국이 정말 달았는데.

나는 시골 애다. 그 당시의 시흥과 안산은 지금처럼 개발되기 전이었고 그 이후에도 나는 오랜 시간 지방 소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외곽 동네의 삶이 주는 정서가 다행히 나에게 맞았다. 동네 구석에 있던 3천 원짜리 단관 극장에서 한 영화를 두 번 연속으로 보는 경험 같은 것. 그게 나의 정체성이자 혼자만의 자부심이다. 미국, 유럽, 호주 이런 곳들 다 멋지고 좋은 곳인데 왜 남미, 쿠바, 모로코 이런 데가 그렇게 끌렸겠어. 거기에는 고유의 풍경이 있다니까. 내 정서를 침투하는.

부자들은 한남동 빌라촌이나 반포 자이 아파트, 맨해튼 건물숲 이런 걸 보면 마음이 흐트러지나. 궁금하네.


볼리비아 수도 라파즈의 동네 풍경


친절하고 잘 웃고 색감을 잘 쓰는 볼리비아 사람들. 성당 앞.


모래 미끄럼틀을 즐기는 동네 아이들. 페루 이카의 오아시스.



* 여행 이후의 삶, 그리고 아직 남은 여행 사진들
집순이 인스타 @k.mang


매거진의 이전글 D+14. 남편의 새 이력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