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 영화 보고 오는 길에 글을 썼습니다
다른 분들이 쓰시는 것처럼 읽은 책을 간결하게 요약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굉장한 추천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꼬박꼬박(최근에는 이 부사를 쓰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정도로 거의 못 썼지만...) 읽은 책에 대해 조금이라도 기록해두려고 하는 건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해서다. 닻을 내리고 정박하는 기분 비슷하려나.
영화 자체로 온전히 완벽한데, 거기에 무슨 말을 보탠다는 게 미안해진다. 그래도 알고 싶었다. 내가 울었던 이유를 스스로에게 캐묻고 싶었다. 언어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글을 쓰지 않으면 작가로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어떻게든 써야 한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영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화로 인해 시작되는 이야기다. -18쪽
이게 너무 나와 같았다. 내가 책에 대한 짤막한 글들을 적어두려고 하는 것과 너무 같은 이유여서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한참 이 문장 위에서 서성였다. 영화에 대한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까, 를 생각하는 작가의 글 곁에서 나도 고민했다.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까. 김정선 선생님은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슬쩍 책 이야기로 넘어가시던데, 역시 사람마다 자기만의 방식이 있는 거겠지.
읽은 책들에 대해 쓰면서, 나는 내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고 싶어 하는 게 뭔지를 알게 됐다. 그건 결국 나를 재발견하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책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 나는 나에 대해 쓰고 있었다. 오늘의 나는 이러했습니다. 이 책은 내게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하는 소소한 발견들을 적어나가고 있었다.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이야기의 패턴도 바뀔 것 같다. 인생은 대하소설일까, 에피소드 별로 구분할 수 있는 코믹 시트콤일까,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짧은 단편영화일까, OTT에서 자주 구성하는 6부작 시리즈일까. -19쪽
무려 두께 3.4cm에 달하는 이 두꺼운 책을 보면서 내가 정말 영화의 세계에서 오래 떠나 있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한때 남부럽지 않은 시네필로 살았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는데, 지금의 나라는 인간은 영화... 를 잘 못 본다. 책은 여전히 잘 읽을 수 있는데 어째서 영화가 보기 힘들어졌을까를 곰곰 고민도 해봤는데, 압도당하는 느낌을 점점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럼 그런 소설은 어떻게 읽는데?라는 질문이 들려오는 것 같아 미리 답하자면, 책은 잠시 쉬어갈 수가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게 잘 안 되었다. PAUSE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영화를 점점 못 보게 되었다.
내가 하는 말에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바로 그런 이유로 영화를 보는 건데?라고 반문하는 아이에게 내가 뭔가를 사랑하게끔 했던 것이 바로 그 사랑을 거둬들이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더니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무슨 말인지 몰라도 된단다 얘.
그럼에도 김중혁 작가의 영화 에세이를 다 읽고 나니 보고 싶은 영화들이 몇 개 생겼다. 쉬엄쉬엄이라도 보고 싶어졌다. 그가 영화를 보며 생각한 것들을 나도 생각해 보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같은 장면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바로 그런 지점에서, 나는 나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 볼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보고 싶다고 메모한 영화들을 보면서 이제 내가 이 장르에서 보고 싶은 게 무엇인지도 알 것 같았다. 책을 뒤지며 밑줄 그은 페이지 밑에 끼적댄 짧은 메모가 유난히 많았다.
"집은 빼앗겨도 우편함까진 못 뺏겨." 그 사람에게 집은 소식이 도착하는 곳이다. <가가린>의 주인공 유리에게 집이란, 엄마가 돌아와야 할 공간이자 엄마가 없을 때 자신을 사랑으로 키워준 공간이다. -39쪽
자신에게 집이란 어떤 공간인가를 정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 집이란 1 사분면의 따스한 양지에 존재하는 그 무엇일 거다. 누군가에게 집은 떠올리는 것조차 괴로울 수도 있으니.
알츠하이머는 시간에 갇히는 병인 것 같다. 삶의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병. 안소니는 계속 시간을 묻는다. "지금이 몇 시지?" -104쪽
특정한 시간의 마디를 반복하며 사는 삶도 힘겨운데 그나마의 디테일조차 하나씩 사라져 가는 삶은 형벌일 것 같다. 다만 그 형벌을 그를 사랑하는 가족들이 감당해야 한다는 아이러니.
성장하는 사람은 자신이 언제 자라는지 알지 못한다. 문득 돌아보면 성장해 있을 때가 많다. -147쪽
오사다 히로시가 바로 이 황망한 감정에 관해 멋진 산문시를 썼다. 「심호흡의 필요」를 권한다.
이토록 짧은 삶을 살면서 아주 긴 시간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이 지닌 가장 훌륭한 장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23쪽
글쎄, 개인적으로는 자신들의 시간만을 상상하지 말고 인간이 아는 존재들을 상상하는 데 시간을 좀 쏟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바꿔 말하면, 행복에는 이유가 없어 보이지만 불행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다른 사람이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구체적이고 분명한 사연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내가 불행한 이유는 나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모호하게 우아해 보이고, 나는 구체적으로 구질구질하다. -307쪽
그러니까 구질구질함 속에서 작은 행복을 찾자. 그거 별 거 아니더라.
우리는 뭔가 배우기 위해 이야기를 읽거나 보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통과하고 나면 무언가 알게 된다. -377쪽
이왕 태어나서 사는 거, 뭘 좀 아는 사람으로 살면 좋지 않나. 그러니까 이야기를 읽자. 많이 읽는 게 좋다면 많이, 깊이 읽는 게 좋다면 깊이. 취향은 존중받아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