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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Dec 19. 2024

감정을 품은 책을 만난다면

바버라 데이비스, 오래된 책들의 메아리

물건들에, 공간에 감정이 스며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공상을 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세상엔 중립이란 게 없겠지.

인간과 비인간을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이 제가끔의 기분과 마음을 갖게 되고 저마다 제 감정을 열심히 어떤 방식으로든 타자에게 전하기 위해 떠들어댄다면 그건 정말이지 대단한 혼란의 카오스가 되겠군,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순간 이 상상은 없던 것으로 하자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늘 괴상망측한 상상의 대가로 살고 있긴 하지만, 이때만큼은 나도 좀 어질어질했다. 어찌 되었든 이야기에는 여백을 주는 인물이건 공간이건 숨 쉴 구멍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모두가 떠들어댄다니 생각만으로도 멀미가 난다.


사이코메트리라는 게 있다. 일종의 초감각적 지각, 혹은 이능력으로도 말할 수 있는데 당연히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는 없다.

이른바 사이코메트리 이론(?)은 세상의 사물들은 그것이 머물렀던 환경과 소유주로부터 특정한 종류의 감정이나 에너지를 흡수하게 되는데, 사이코메트리 능력자들은 바로 이러한 사물에 집적된 에너지-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고 한다.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굉장히 흥미로운 얘기다. 여기에 상상력이 덧붙여져 나온 영화와 소설도 셀 수 없이 많다. 지금부터 소개할 소설에도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보유한 여주인공이 등장하는데, 고서점을 운영하며 책 수선가이기도 한 애슐린은 중고책들로부터 책 소유주가 그 책과 맺고 있는 특별한 감정들을 감지해 내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다만 이 책은 사이코메트리 능력이 그녀에게 축복인지, 저주인지에 대해 다루는 소설은 아니다.


애슐린은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처분을 부탁하는 중고책 한 더미를 받게 되고, 그중 어떤 책에서 쓸쓸함을, 심장이 무너지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과 원망.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상대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현재진행형으로 산화하고 있는 듯한 통증에 시달린 애슐린은 책의 서지정보를 뒤지지만 그런 강렬한 감각을 전달한 그 책은 저자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를 전해주지 않는다.


책의 저자를 알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 애슐린에게, 놀랍게도 그 책과 마치 쌍둥이처럼 같은 이야기를 다른 이의 시점에서 서술한 새로운 책이 출현한다. 다만 앞의 책과 다르게 새로 나타난 이 책의 서술자는 명백히 여성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원망하며 써 내려간 것이 확실해 보이는 책들을 번갈아 읽으며 애슐린은 도리없이 이 한 쌍의 연인에게 일어난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들은 이렇게 맹렬하게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면서도 상대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한다.


그들은 실존 인물일까? 이 책은 어쩌다 한꺼번에 애슐린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일까?


1940년대의 미국 상류 사회에 어떤 종류의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던 내게, 미스터리의 형식과 로맨스의 요소를 일부 빌려와 엮은 이 소설은 아마도 이러저러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짚었던 얄팍한 추측에 퍽 센 펀치를 먹였다.

가족 서사 family saga까지는 가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그 영역을 건드리고 있는 듯한 느낌인 것이, 이 소설에는 당시의 정치적 이슈와 사회 문제가 상당히 긴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액자 소설에 해당하는 <후회하는 벨>과 <영원히, 그리고 다른 거짓말들>의 여주인공 벨은 당시 미국의 반유대주의 정서가 존재했던 상류 사회에 속한 가문의 딸이었으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밝힐 수는 없지만 그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한 탓이다.


좋은 소설들이 늘 그렇듯, 여기에도 각자의 상처를 안고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각자의 방법으로 상실과 상처를 극복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렇듯, 소설 속의 인물들 역시 불가해한 타인의 속내와 진심을 알기 위해 싸우고 고민하며 어떤 경우에는 포기하기도 하는 모습에서 또 위로를 얻게 되기에, 그들을 응원하며 결국 나 자신을 응원하게 되기에 한 권의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또 다른 소설을 손에 들게 되는 것 같다.


"책은 사람과 같단다, 애술린. 주위의 공기 중에 떠다니는 건 다 흡수하지. 연기, 기름, 곰팡이 홀씨. 그러니 감정이라고 흡수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니? 감정도 다른 모든 것처럼 실제로 존재하잖아. 책보다 더 개인적인 사물은 없단다. 특히 누군가의 삶에 중요한 일부가 된 책이라면 더 그렇지." -17쪽


우리는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 읽는 게 아니라 삶을 더 깊이 있고 풍부하게 사는 법을 익히기 위해, 타인의 눈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읽는다. -81쪽


"그런 자칭 애국자들이 힘을 갖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 관심을 가지는 거야, 벨. 당신이 어쩌다 우연히 나쁜 편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 그 문제에 관해 어느 편에 서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189쪽


책꽂이마다 빽빽하게 꽂혀 있는 과거, 즉 메아리가 없는 책들은 지금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석판 같지만, 언젠가는 자기만의 역사를 가지게 될 것이고, 책 표지 사이에 들어있는 이야기들과는 분리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4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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