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영화 <그녀>에 대한 스포일러가 살짝 있습니다.
만약에 인공지능과 연애를 할 수 있다면?
물리적인 실체도 없는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다면 무슨 모습일까?
영화 <그녀>는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다. <존 말코비치 되기>라는 독특한 영화를 만든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연출했다. 이번 영화도 괴상할 것 같지만, 많은 사람들이 매혹될 정도로 감각적이고 감수성 있는 연출을 보여준다.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운영체제와의 사랑에 빠져들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가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락 밴드로 유명한 아케이드 파이어가 작곡했다. 그들이 영화의 ost를 작곡하는 데에 1년 이상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만든 곡 하나하나가 다 주옥같다.) 영화 안의 세계와 관계를 음악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며, 그들의 독창적인 결과물은 작업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따뜻해지고 친밀해졌다고 한다.
궁극적으로 arcade fire의 작업물은 영화가 보여주는 미래 사회의 '낯섦'과 관계에 스며있는 '익숙함'을 동시에 담아낸 것이다.
Song On The Beach는 인공지능인 사만다가 직접 작곡한 3분 30초짜리 음악이다. 원래 감독은 아케이드 파이어에게 사만다가 만들었을 30초 분량의 음악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들은 수많은 데모 곡들을 만들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감독은 3분 30초짜리 음악을 채택하게 된다. 이로써 30초짜리가 될 수 있었던 영상은 3분 30초짜리 분량이 되어, 결혼의 목적에 관한 진지한 대화를 담아낸 영상들로 그 여백을 채워 넣는다. 결혼생활을 궁금해하는 사만다를 위해 테오도르는 자신이 전 아내와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다. 이때 테오도르와 그의 전 아내가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추억들이 영상으로 지나간다. Arcade Fire의 3분 30초짜리 음악은 이렇게 결혼에 관한 진한 여운을 남기게 한다.
그래도 기분이 좋아지는 무언가가 있어.
누군가와 삶을 함께 나눈다는 것.
너의 삶을 어떻게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거야?
글쎄, 우리는 함께 성장했거든.
그리고 Song On The Beach는 현란한 피아노 소리와 함께 Photograph라는 음악으로 발전된다. 아니 대체된다. 이 음악은 테오도르와 함께 찍은 사진이 없는 사만다가, 둘만의 순간을 '음악'이라는 사진으로 담아내기 위해 작곡했다. 음악이 흐르면서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데이트하는 장면들이 지나 간다. Song On The Beach가 전 아내와의 관계를 담아낸 음악으로 나타났다면, Photograph는 사만다와의 관계를 담아낸 음악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나온 사진이 너무 좋아.
거기에 네가 보여.
그래, 나야.
이 영화는 작곡에 힘을 쓴 만큼 청각적으로 사랑을 보여준다. 인공지능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사만다와 테오도르의 관계에서 대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들이 처음 섹스를 할 때에도 온전히 대화만으로 진행하는 것처럼.
그들의 순간순간들은 함께 만든 음악들로 현상된다. 때문에 사만다와 테오도르의 관계에서 음악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음악이 흐르면서 지나가는 화면에는 테오도르 혼자 뿐이다. 물론 우리는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어느 순간 테오도르가 외로워 보이기도 한다. Photograph 음악의 현란한 피아노 소리가 마냥 행복하게 들린다기보다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담아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홀로 서있는 테오도르가 외로워보였기 때문일까? 현란한 피아노 소리가 지나가고 다시 익숙한 Song On The Beach의 피아노 선율이 나올 때, 어쩌면 나는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헤어지고 다시 인간과의 관계로 복귀할 것임을 직관했을지도 모른다.
난 달에 누워있어요
내 사랑, 곧 그리 갈게요
그곳은 조용한, 별이 빛나는 곳
우리의 시간은 삼켜지고
우리가 있는 공간은 백만 마일 떨어져 있죠
당신한테 알고 싶은 게 있어요
당신한테 숨기는 건 없어요
어둡고 빛나는 그곳
하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내 사랑
난 안전해요, 우리는 백만 마일 떨어져 있죠
영화 음악을 작곡하고 나서, Arcade Fire는 영감을 받아 그들의 새 앨범인 Reflektcor의 마지막 트랙을 작곡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그 음악을 공유하고자 한다. 영화의 감수성이 폴 폴 느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