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제인> 비평
*영화 <꿈의 제인>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느 모텔에서, 소현은 목욕물에 손목을 담그고는 칼을 긋는다. 죽음으로 얼마 가라앉기도 전에 갑자기 트렌스젠더 제인이 그녀를 찾아온다. 제인은 자신이 일하는 곳에서 소현의 손목을 치료해주고 신경을 써주는 것이다. 소현은 제인을 따라가서 그녀의 가족에 합류하기로 한다. 때때로 귀엽고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깊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또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한 제인과의 나날은 꿈만 같다. 그러나 곧 불안감이 엄습한다. 어느 순간 무언가를 매듭짓는 듯한 소현의 내레이션은 그동안의 모든 감정의 파노라마를 흔들어 놓는다. ‘이제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 거에요. 제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도,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도 없던 때로 말이에요.’
영화 중간에서 눈치챘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영화가 끝으로 다다르면서 우리는 제인과의 나날들이 소현의 꿈이라는 걸 알게 된다. 디스코 볼에 반사되어 흐트러지는 불빛들, 몽환적인 음악에 묻혀져 나온 꿈의 시간들은 소현의 삶에서 그녀가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었다. 왜 그녀는 꿈을 꾼 것일까?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꿈의 시간으로 향하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일까?
먼저 꿈 속의 제인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영화에서 제인의 분량이 길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영화의 제목은 제인을 가리킨다. 그 이유를 소현의 새끼 발가락에서 찾을 수 있다. 꿈에서 소현은 잘린 새끼발가락을 보여주며, 마치 새끼발가락이 진짜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느낀다고 말한다. 나름대로 공감을 하는 제인을 보며 소현은 신기해 한다. 다른 사람들은 소현의 느낌보다는 소현이 왜 발가락을 잃었는지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제인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유를 찾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외면만을 보며 그녀가 느끼는 남성성의 부재감을 믿지 않았다. 소현도 제인도 자신의 부재감에 대한 이유보다 그것에 대한 느낌에 집중한다.
영화에서 소현은 나약하고 애처롭게 그려지지만, 제인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불행하게 오래 살라.’는 이상하면서도 따스한 말을 건내며 소현에게 용기를 준다. 부재감을 느껴 자신의 호르몬을 바꾸고 겉모습을 여성으로 치장한 점에서 제인은 그 누구보다도 용기 있는 사람이다. 어쩌면 영화는 사회의 소수자들이 겪는 숨막히는 공기를 소현을 통해, 그리고 그것을 감내하며 강해진 모습을 제인을 통해 나타내려 했는지도 모른다. 잘린 새끼 발가락과 텅 빈 남성성. 이런 점에서 꿈의 제인은 무척이나 소현과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소현의 꿈은 무슨 의미일까? 소현이 현실로부터 도망친 것일까? 괜히 꿈 속 제인의 자살이 불길하기만 하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제인이 따스한 말을 할 때, 나는 ‘아까 그건 소현의 꿈이었구나.’라는 깨달음과, 영화의 메시지가 주는 깊은 울림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의 소현의 운명에 대한 불안을 느꼈다. 이 모든 것들이 자살을 앞둔 소현의 주마등일 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통찰. 따스한 과거로 끝을 맺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토록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꿈과 현실이 구분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답하기엔 영화는 끊임없이 모든 순간들을 마치 꿈처럼, 때로는 몽환적이기도 하면서도 때로는 과거와 현재가 뒤엉켜 어느것이 진짜라고 장담할 수 없을 그런 방식으로 소현의 삶을 보여준다. 영화 음악을 작곡한 플래시 플러드 달링스는 영화의 주제곡을 방향 없는 삶의 허무함과 지루함을 그린 노래라고 설명한다. 시간은 꿈처럼 어느 순간 눈을 뜨면 흘러가 있고 방향 없는 현실은 꿈처럼 희미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 안개 안에서 어떤 누군가가 자신을 깨워 주기를 바라는 작은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영화의 모든 순간들이 깨어나고 싶은 꿈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편지를 쓰는 소현의 내레이션이 영화의 순간들과 불일치하는 건 그래서 일까? 숨막히는 시간들로 삶은 희미해지는데, 그것을 현실로서 오롯이 직면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게 꿈이라면, 영화 초반의 소현의 꿈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아직 깨어나지 않은 그녀의 꿈에서 옮겨간 또다른 꿈일 수도 있다. 소현의 꿈은 회피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애매함과 뒤늦은 깨달음, 뒤늦은 불안이 중첩되는 순간 순간을 맞이하면서 점점 혼미해진다. 주체로서의 소현이 지워진 시간이 정말로 존재하는 시간인 건지 의심할 수도 있다. 사랑을 주고 싶어도 그것이 도달되지 않는 아득한 세계. 그러나 영화는 따스하게 끝난다.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괴로움을 감내하기로 결심한 삶 속에서 서로를 위해, 그리고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내기로 한다. 소현은 손목을 그었다. 그러나 제인은 소현의 손목에 ’Unhappy'라는 도장을 찍어준다. 제인에게 구원받은 소현은 죽음으로 가라앉을 그 경계에서 결국 실존적 삶의 혼미함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제인의 자살은 소현의 죽음이 아니다. 그저 제인이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일 지도 모른다. 소현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그녀는 흘러가는 시간에 균열을 내어, 그 균열 속 제인을 되새기며,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겠다는 용기를 얻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행하고 꿈처럼 아득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 이 영화를 연출한 조현훈 감독이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뉴스를 접하고 나서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왜 이 영화를 오직 '조현훈'만의 영화라고 보고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영화가 공동작업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꿈의 제인> 역시 단순히 감독만의 작품이 아닌, 배우, 음악감독, 미술감독 등의 여러 스탭들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이 영화를 조현훈의 영화로 보고싶지 않다.
작가의 행동, 생각에 대한 평가와 예술작품의 가치평가를 구분지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차치해두고,
적어도 '영화는 여러 사람들의 합동품이다.'라는 명제를 가지고 <꿈의제인>을 긍정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조현훈은 <꿈의 제인>에 먹칠을 한 장본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