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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 Nov 23. 2020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라이프 오브 파이> 비평

*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병동에 누운 파이가 선박회사 직원들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을 보고 나서는 이런 생각을 했다. ‘뭐야. 결국 다 꾸며낸 거였고, 두 번째 이야기가 진짜네.’ 파이의 두 이야기를 비교해 볼 때, 주방장, 선원, 어머니와 함께 표류한 끔찍한 이야기가 더 사실에 부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선박회사 직원들도, 소설가도, 벵골 호랑이와 표류한 이야기를 믿기로 한다. 여기에서 그들은 왜 벵골 호랑이와 표류한 이야기를 믿기로 한 것일까? 영화는 왜 사실에 부합해 보이는 이야기가 아니라 믿기 힘든 이야기를 보여주는 걸까?




형이상학의 역사

우리는 꽤 긴 러닝타임 동안 파이의 유년시절을 보게 된다. 영화는 파이가 종교를 얻게 되는 과정, 이성을 강조하는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에게 초월적 영역을 부정당하면서 얻게 된 무력감을 보여준다. 이는 인간의 형이상학 역사와 어느정도 겹치기도 한다. 여기에서 형이상학이란 “경험과 감각적인 것, 사물적인 것을 넘어서는 영역에 대해 생각하고 해명하는 철학”을 가리킨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이 형이상학적 존재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란 알기를 원하는 본성을 갖고 있는 존재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인간은 자신들을 둘러싼 사건들을 해명하기 위해 탐구한다. 신화는 바로 그 탐구 과정에서 탄생했다. 신화라는 이야기를 통해 존재의 이유와 목적, 의미를 구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이냐고 묻는 소설가에게 파이가 '당신에게 달렸죠. 이제 당신의 이야기니까.’라고 대답하는 장면은, 전승된다는 신화의 특징을 드러낸다. 즉 파이의 이야기는 파이의 소유물로서가 아니라, 인간이 보편적으로 탐구하는 거대한 흐름으로서의 이야기인 것이다. 표류하면서 극복한 것들과 얻게 된 교훈들은 그의 유년시절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며, 이제 소설가를 통해 그 내면의 탐구는 더 확장되는 것이다.

합리성으로 존재를 체계화하는 특징을 지닌 철학이라는 작업은 신화를 대체한다.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서 철학적 작업은 확증될 수 없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배제하면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엄격하게 구축된다. 여기에서 신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들어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가족을 잃고 벵골 호랑이와 망망대해를 한없이 떠다녀야만 하는 끔찍한 상황에서 영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너머의 것이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보여준다.


거울

우리는 이 영화에서 거울처럼 반사되는 물의 이미지를 자주 보게 된다. 여기에서 ‘거울’은 그 자체로 어떻게 생겼는지 묘사될 수 없는 물질이다. 거울은 언제나 다른 대상을 반사하며, 그 반사상은 실제 물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기보다는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들고 보이는 방식을 변화시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낸다. 파도가 멎어 잠잠해진 바다를 카메라는 아주 넓게 포착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보지 못하며, 마치 하늘이나 우주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파이와 리차드 파커의 보트를 보게 된다. 이 신비로운 이미지는 언제나 모든 존재가 우리의 인식 안에서 온전히 파악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물 그 자체가 주는 인상에서 나아가 어떤 새로운 인상을 느낄 수도 있도록 유도해낸다.



또 거울은 인물의 내면을 반영한다. 이 메시지는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초반부에 이성을 강조하던 파이의 아버지는 호랑이의 눈에 비치는 건 파이의 감정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호랑이라는 맹수를 대하는 방식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의 가치관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러한 반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중간에 보트에서 천막을 들어올려 리차드 파커를 쳐다보는 파이의 이미지는 그것을 형상화한다. 리차드의 눈에 비치는 파이의 실루엣은 인간의 눈동자와 흡사하게 보인다. 여기에서 카메라는 오랫동안 리차드의 두 눈과 파이의 모습을 담아내는데, 리차드의 눈과 떨고 있는 파이를 교차함으로써 그가 리차드의 눈에서 자기 자신의 두려움을 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장면이 끝나고 나서 파이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호랑이를 합리적인 방식으로 조련하려고 노력한다.



영화 말미에 파이는 리차드의 눈을 통해 자신의 모습뿐 아니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는 중간에 파이가 리차드와 함께 바닷속을 쳐다보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단순히 바닷속을 보는 장면을 연출하려 한다면 그저 카메라를 바닷속으로 들어가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리차드의 얼굴로 클로즈업하다가 서서히 바닷속 이미지로 전환시킨다. 그 후 해저 바닥에 이를 때까지 여러 이미지들을 보여준 다음에 파이의 얼굴로 빠져나온다. 이는 단순히 바닷속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보는 존재자 속으로 들어가 그가 받아들이는 바다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면이 파이의 내면과 리차드의 내면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다를 통해 그것이 공유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공유는 단순히 리처드가 파이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로만 존재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호랑이라는 존재는 몹시 위협적이고 절망적이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오히려 희망이 보이지 않는 무의미의 망망대해에서 삶을 이어나갈 동기가 되어준다. 파이는 끝까지 ‘리차드 파커’라는 이름을 부르며, 그가 사람인 것처럼 말을 건넸다. 그의 앞에 선 존재자는 그의 생존을 위해 ‘동물’로 인식되어야 했지만, 동시에 ‘삶’을 위해 ‘리차드 파커’로 인식되어야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삶’이란 관계맺음과 공감을 함축한다. 그는 리차드 파커의 눈에서 자신의 감정을 보았지만, 거기에서 나아가 리차드 파커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공감하려 노력했다. 파이가 폭풍우 속에서 신을 마주하라고 배의 천막을 걷을 때, 발버둥치는 리차드의 눈을 본 파이는 그가 겁을 먹은 상태라고 받아들인다. 이 공감의 행위를 통해 파이는 리차드를 끌어안고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리차드는 단순히 동물에 머무는 게 아니라, 파이와 동등하게 관계 맺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파이와 리차드의 연결이며, 파이가 리차드에게서 포착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일 테다.

혹자는 파이와 리차드가 연결된다는 것이 순전히 파이의 착각에 불과하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쌍방향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면, 리처드 파커는 자신의 생존에 있어서 모든 욕구를 해결해 주는 미어캣 섬에서 파이의 부름에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며, 파이와 함께 섬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혹자는 리차드가 훈육에 의해서 기계적으로 달려온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리차드 파커는 파이의 호루라기 소리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신앙

파이의 아버지가 이성을 강조한 건, 파이가 맹목적 믿음에 빠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파이가 여전히 호랑이에게 영혼이 있고 마냥 호랑이와 친분을 맺을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는 이미 바다 위에서 호랑이에게 잡아먹혔을 지도 모른다. 존재 너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꽤 많이 위험해 보인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믿음은 지나치게 현실과 동떨어져 보일 수도 있고, 맹목적이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존재 너머의 것을 왜 믿어야 하는가?

이 의문에 대해서는 미어캣 에피소드가 어느정도 대답을 해주고 있다. 파이는 미어캣의 섬에서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하게 된다. 전무한 위험요소, 귀여운 미어캣, 풍부한 식량을 보며 그 섬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밤에 그 섬이 생명체를 잡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여기에서 파이는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은 생존에 대한 불안에서 기인한 게 아니었다. 그가 계속 나뭇가지 위에서 잠을 잘 수 있다면 살아있는 동안 섬에 잡아먹힐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이라는 계기를 통해 삶을 사는 빙식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 섬 안에서 홀로 산다는 것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제 파이는 생존에 대한 맹목성에서 벗어나, 생존을 위협하지만 의미를 지닌 삶의 가능성이 있는 망망대해로 기꺼이 나간다. 섬에 다다르기 전까지 신을 의심해왔다면, 이제 섬을 떠나는 그는 능동적으로 신을 믿게 된다. 그렇다면 이 능동적인 믿음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신을 믿을 수 있을까?

파이는 자기가 겪은 사건들이 전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여기에서 그가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이성으로 포착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물론 그것들은 어느정도 이성으로 규명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이성적 작업은 삶에서도 중요하게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모든 것을 포착할 수 없다. 우리의 인식 자체의 오류 가능성도 언제나 존재한다. 따라서 지식은 언제나 반증 가능성을 함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확실함 앞에서 그는 어떤 것을 믿어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파이는 모든 사건이 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정한다. 이 인정이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물론 원인에 의해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파이가 신의 존재를 믿고 매 사건들로부터 의미를 도출해내는 작업 자체가, 그가 능동적으로 의미화하는 작업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능이며, 바로 이 본능에서 신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신은 인간이 능동적이기 때문에 탄생하며, 인간이 능동적이기 때문에 믿음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증명될 수 없는 어떤 사건들 앞에서 의미화 작업을 통해 진실을 어떻게 능동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은 이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갖되 이성이 다다르지 못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능동적으로 어떤 믿음을 형성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무의미한 망망대해, 한 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무한함 속에서 그가 생존할 수 있었던 요인은 이성뿐만이 아니었다. 그 무의미의 시간을 견뎌내는 형의상학적 본능 또한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다. 그것이 삶의 동력이 되어주고, 삶의 방식을 결정짓는다. 파이가 미어캣 섬이 가져다주는 안락함에 의해 수동적이고 무의미하게 살 수도 있지만,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다양한 가능성의 바다로 기꺼이 표류할 수도 있다. 아니, 이제 표류라는 말은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휩쓸리기만 했던 파이는 비로소 항해하기 시작한다. 섬을 빠져나가는 장면 다음에 그가 표류하는 장면 없이 육지에 다다르는 장면을 보여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쨌거나 파이는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이야기가 사실일까? 모른다. 우리는 파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고를 수 있을까? 첫 번째를 고를 수도, 두 번째를 고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 또한 영화 속 인물들처럼 첫 번째를 고를 것 같다. 그가 표류하면서 겪은 내면적인 과정들이 첫 번째 이야기에 온전히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이야기보다 두 번째 이야기가 더 사실적으로 보일 수 있더라도, 첫 번째 이야기가 두 번째 이야기보다 더 진실되어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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