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디자인 적응기 #4
첫 회사에 입사하고 2년 정도 지났을 때 내가 담당해 작업하던 책이 발간 10주년이 되어 행사를 하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가 특정 분야의 단체이고, 그 분야에 특화된 책들을 발간하는데 내가 주로 담당했던 책은 청소년 대상 격월간 정기 간행물이었다. 처음 발간할 때 정기구독자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해가 갈수록 그 규모가 커지기도 했고, 10년을 지나온 기념으로 기념행사를 시작하게 됐다.
공간을 대여해 우리 책의 정기구독 독자인 청소년들을 모아 행사를 하니 홍보에 필요한 디자인 작업들을 맡아서 했었다. 포스터, 플래카드, 초대장, 입배너, 홍보물 등을 디자인했는데 10주년 때의 디자인은 내가 생각하고 기획한 대로 디자인 작업을 다했다. 피드백이야 받았지만 전체적인 아이디어는 오롯이 내 것이었고 결과물도 내가 만들고 싶었던 대로 만들었었다. (사실 고집도 많이 피웠었다. 행사를 치르는데 문제가 없으니 넘어들 가셨지만 100% 공감을 얻었던 디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막내의 똥고집을 잘 들어주셨던 분들에게 새삼 감사하게 된다. ㅋㅋㅋ)
이때의 나는 디자이너라면 기본적인 기획안이 나온 뒤에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와 그 과정에 대한 결정권은 무조건 디자이너가 주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었다. 협업을 하는 관계라 해도 내가 생각한 것과 결이 다른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를 듣는 것에 자존심 상해하고, 거부감을 많이 가졌었다. 그래서 디자인을 진행 중에 내가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들을 들으면 그것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어떻게든 생각해내서 내가 생각한 대로 디자인해야만 직성이 풀렸었다. (이때가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에 대한 똥고집을 가장 심하게 부리던 시기였는데 이때의 집착이 디자인 실력을 높이는데 일조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참 치기 어린 아집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11주년 때의 디자인은 조금 달랐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내 것이었던 게 맞다. 거기다 실력도 10주년 때보다 나아졌었다. 기본 디자인 컨셉이 괜찮다고 동료분들도 말씀하셨었고 말이다. 하지만 완성도의 마지막 '한 끗'을 채우는 아이디어는 내가 생각한 게 아니었다. 편집장님이 지나가듯 말씀하셨던 한마디가 조금은 아쉬웠던 한 점을 채우는 것이 됐다. 그 한마디는 정말 작은 부분에 대한 언급이었다.
당시 디자인의 기본 컨셉은 11주년을 기념해 축배를 드는 분위기를 표현하는 거였다. 그래서 포스터의 가운데에 행사 제목을 넣고 제목에서 폭죽처럼 터져 퍼지는 물결을 표현했는데 난 그 시작점을 제목 글자의 한 획 위로 지정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책의 메인 캐릭터 중 하나를 배치했는데 정말 딱 '2%'가 부족했다. 그 아쉬움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고민하고 있었는데 편집장님이 지나가듯 '물결 시작점을 캐릭터 손에서 시작하면 되겠네' 하시는 거다. 정말 심드렁하게 쓱 말씀하고 가시는데 그때 정말 '아니, 내가 왜 이걸 생각을 못했지? 나 센스가 이렇게 안 좋은 애였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엄~~~청 자존심이 상하는거다. 누군가는 별것도 아닌 걸로 난리다 하겠지만 이때의 일은 내게 정말 충격이었다. 당시 디자인의 완성을 위한 '한 끗'이 나한테서가 아니라 디자인을 직접 해보신 적 없는 편집장님의 의견에서 나온 거니 말이다.
오랜 경험이 쌓인 지금이야 어쭙잖게 경력 쌓인 2-3년 차 디자이너들보다 직접 디자인하지 않아도 10년 넘게 디자인을 봐온 다른 분야 전문가들의 보는 눈이 더 높다는 걸 알지만 그때는 이걸 인정하는 게 참 어려웠다. 편집장님이 지나가듯 하신 말씀이 내 고민을 해결하는 방안이었기에 그대로 반영해 전체 디자인을 잘 마무리했지만 '마지막 완성의 아이디어가 내 것이 아닌데 이 디자인을 과연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꽤나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때부터 '과연 내가 한 디자인은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했던 것 같다. 디자인 작업을 할 때마다 '내 디자인은 어느 부분인가, 이 전체를 내가 디자인했다고 할 수 있는 과정인가?'라는 생각으로 작업했었는데 여러 가지 프로젝트들을 경험하면서 이 질문이 점점 다르게 바뀌었다. 어릴 때의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을 좋아 보이도록 만드는 것, 시각화된 결과물의 세련됨'만이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경력이 쌓이다 보니 디자인의 영역은 그렇게 좁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제품을 기획하고, 사용할 고객을 선정한 뒤, 고객과 제품의 첫 대면부터 사용완료까지의 과정 내내 고객으로 하여금 기획단이 바라던 대로의 경험을 하도록 만들면서 더 좋은 기억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게 디자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이 과정의 탄탄함은 절대 디자이너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품의 첫 아이디어를 내고 결과물을 상상하며 뼈대를 구축한 기획자, 그 기획을 시각화하고 경험의 과정을 설계하는 디자이너, 시각화된 아이디어를 실제 만질 수 있는 제품으로 만드는 제작자 또는 개발자, 고객과 제품이 만날 수 있도록 홍보하는 마케터, 판매처를 확보하는 영업자 모두가 같이 생각을 공유하고 다듬어가야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내 나름의 디자인 개념을 정립하고 나니 '혼자 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게 됐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목표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한 문제 해결의 과정 중에 협업자들과 긴밀히 소통하면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생각하며 작업하게 되니 프로젝트 전체를 볼 수 있는 눈과 내가 직접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할 수 있는 능력도 갖게 되더라. 거기다 내가 잘할 수 있는 부분과 내가 못하는 부분에 대한 파악도 잘하게 되니 내가 집중해야 할 부분이 명확해지고, 내가 못하는 부분을 잘하는 사람을 찾아 협업하게 되어 인맥도 늘고 함께 성장하는 기회들을 만들어 갈 수 있게 되더라. 결국 내가 혼자 스스로 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을 벗으니 되레 실력도 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10년이 넘게 걸렸고 가끔은 다시 혼자 해야 한다는 강박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래도 이제는 협업자들과 충분히 소통하면서 좋은 결과물을 냈던 지난 경험들을 되돌아보면 다시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도 강박과 여유는 반복될 것 같은데 이제 바라는 건 함께하기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 재미있는 작업들을 다양하게 하는 거다. 생활의 활력이 되는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