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나나 Dec 10. 2021

가사가 없는 음악을 듣는 재미

또 다른 테크노의 매력을 이야기하다


가사가 없는 음악은 듣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창작자의 의도가 비교적 분명한 편이 듣기 편했달까? 보편적인 인류애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까지, 내가 아는 단어로 표현된 작곡가/작사가의 의도를 따고 흘러가는 게 한없이 즐거울 때가 있었다.


‘이 사람은 만남의 기쁨을 이런 단어와 음율로 표현했구나.’

‘이들에게 가족과의 이별이란 이러한 단어와 멜로디의 조합이구나.’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명백히 드러나는 창작자의 의도를 느끼고 또 반추하는 것.

한때 나에게 감상이란 완성된 형태를 오감으로 느끼는 중에 피어나는 감정을 음미하는 것이었다. 그때그때 밀려오는 감정을 파도타기 하는 것이 감상이었다면 지금은 좀 달라졌다. 현재 나에게 “감상”이란 생각의 종이를 이리 접고 저리 접으며 나만의 형태를 만들어 가는 행위와 그 결과물을 즐기는 일이다.


나만의 생각을 재료로 잘랐다가 붙였다가 따라 그렸다가 하는 나만의 “감상”을 행하기 위해서는 가사가 없는 편이 있는 편보다 훨씬 수월하다. 완성된 무엇의 실루엣을 따라 유연히 움직이는 것이 아닌, 뮤지션이 선사한 계기(멜로디)를 바탕으로 세상의 수많은 것들을 이리저리 긁어 모아 조합해 보는 일. 여기서 오는 자유도 큰 매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절절히 그리는 가사를 두고 멜로디만을 뚝 떼어다가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좌절”의 감정을 대입시키는 건 이상하지 않겠는가. 누군가는 창작자의 의도를 벗어난 감상이나 해석을 불편하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난 이 또한 예술이 가지는 자유의 한 측면이라고 본다. 작곡자가 처음 떠올린 무언가를 형상화한 멜로디를 꼭 그렇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의 환상적인 작품과 수고에 고마워하면서 나만의 감정을 투영하는 것이야말로 감상에서 중요한 자세라 믿기 때문이다.


가사가 없는 테크노 음악에도 다른 모든 음악들이 그렇듯(예외도 있는 법이지만) 제목이 있다. 나 또한 제목이라는 “길”을 따라가면서 음악을 즐기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은 적이 더 많다.


일반적으로 가사가 자세한 설명이라면 제목은 주제, 중심 키워드다. 가사가 있는 음악을 들을 때 이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나만의 해석을 펼치며 음악을 듣는 생각보다 어렵다. 빤히 드러나는 의도를 무시해야 하는 의도적인 행위도 그렇지만 불쑥불쑥 올라오는 “이래도 될까?”하는 마음 때문에 더 그렇다. 여기서 뻔한 문장 하나로 변명해보자면 “세상사 정답은 없다”. 그들이 명명백백하게 못 박은 “제목”이지만 다양한 배경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 또한 존재한다. 그 가능성을 파고들면서 나만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이자 즐거움이라 말하고 싶다.


가사기 없는 음악을 통한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폭넓은 장르를 횡단하는 잡식성 취향이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구축한 취향의 집은 아직 좁기만 하다. 그래서 당분간은 테크노라는 장르를 통해 ‘가사가 없는 음악’을 감상할 때의 자유를 만끽하고자 한다.


아, 혹 누군가가


“클래식도 있는데 굳이 테크노를 언급하는 이유가 있나요?”


라고 질문하신다면!

끊김 없이 한 곡을 오롯이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테크노를 이야기한 것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요즘 테크노에 빠져 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리고 테크노를 시작점으로 확장 중인 취향의 경계와 가사 없는 음악을 하는 몇몇 뮤지션도 계속해서 소개할 예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테크노 전사가 처방한 감정조절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