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기증이 어색한 어른들의 오해와 그로 인한 상처에 대한 이야기
1년 5개월 전에 돌아가신 아빠는 돌아가시기 1~2년 전부터 '시신기증'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기 시작하셨다. 발단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결심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 어느 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대학병원에 시신기증을 하기로 했다며 가족들에게 공표하셨다. 마지막까지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두 분의 선택에는 평생에 걸쳐 실천해온 기독교 정신을 잘 마무리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처음 두 분의 결정을 들었을 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두 분이 마음을 바꾸시길 바랐다. 남들처럼 평범한 선택을 하시길 바랐다. 하지만 엄마와 외삼촌, 이모들이 반대하지 않으시는데 손녀인 내가 별 수 있나. 어른들의 선택은 이런 것인가, 하는 마음과 동시에 이모, 삼촌들이 지금은 반대하지 않으시지만 종국에는 그 뜻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묘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먼저 가신 외할머니의 소지품 속에서 시신기증 등록증을 꺼낸 외삼촌은 주저 없이 대학병원으로 전화를 하셨다. 부모의 뜻을 잊지 않았다는 마음이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담담하게 외삼촌과 이모, 엄마는 외할머니의 유지를 따랐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축적된 짧은 경험 덕분인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당황도 주저함도 없었다(내가 보기엔 그랬다. 그분들의 마음을 헤아릴 순 없겠지만). 외할머니와 이별할 때처럼 그렇게 외할어버지도 보내드렸다. 단 한 번의 불협화음을 내비치지 않은 채 가족들은 두 분의 생전에 밝힌 뜻을 따랐다.
종갓집의 낡은 방식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아빠에게 3대 기독교 집안의 가풍을 지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시신기증'이라는 선택은 여러 측면에서 괜찮아 보였나 보다. 그렇다고 해서 "나도 시신기증을 하겠다!"라고 공공연히 선언을 하신 건 아니었다. 가끔 가다 한 번씩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선택은 참 아름다웠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나도 시신기증을 고려해봐야겠네." 정도였다. '시신기증'이라는 선택을 마음속 한켠에 간직은 해 두셨지만 당신의 속내를 본격적으로 꺼내기 시작하신 건 코로나 19 사태 이후의 일이었다.
코로나 19로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서 생로병사의 이치마저 멈추지는 않는다. '생활 속 방역'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몰아친 때에 아빠는 3~4번의 장례식에 발걸음을 옮기셨고 그곳에서의 경험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모양이다.
"시신 기증 절차 좀 알아봐라. 나도 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처럼 시신기증을 하고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하련다. 자식들에게도 큰 부담 주지 않고 마지막까지 좋은 일도 할 수 있고 말야."
자식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고 또 달갑지 않은 이야기였다. 갑자기 시신기증이라니? 가족장이라니? 딱히 큰 병을 앓고 계신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지? 이걸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슬프게도 아빠의 생전 발언은 예언이 되어버렸다. 나의 고집 때문에 생전에 시신기증 신청을 끝마치지는 못했지만 엄마는 아빠의 유지를 받아들였고 우리는 시신기증과 가족장으로 아빠를 보내드렸다.
우리 기족은 두 번의 경험이 있어 이러한 장례 형식에 그 어떤 위화감도 없었지만 친가 친인척을 비롯한 아빠의 친구와 지인분에게는 생소하고 또 이해가 되지 않는 처사였던 모양이다. 고인의 뜻이었다는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왜 굳이 시신기증을 선택해야 했는지, 고인이 그걸 바랐다면 장례식만이라도 일반적인 절차를 따를 수 없었는지 질문하시는 분들도 많아서 몇 번이고 설명해야 했었다. 연령대가 70대 전후의 분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일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유족으로서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아빠와 가까운 분일수록 아빠의 결정을 이해해주시라 믿었다.
하지만 잘 모르는 것, 생소한 것을 받아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다. 그것이 지인의 죽음과 연결된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아빠의 몇몇 지인들은 자신들의 상식밖에 위치하는 시신기증과 가족장을 쉽게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분들에게 고인의 시신이 없는, 자신들이 참석하지 못한 장례식은 장례식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그분들에게 우리 아빠는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우리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한도에서 상황을 보고 느끼고 판단한다. 그분들도 필시 그러했을 것이다. 각자가 가지는 판단의 기준이 다 다른만큼 그분들의 오해(우리 입장에서는 오해지만)를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장례를 치르지 못한"이라는 표현이 유족에게 미칠 영향 정도는 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우연히 아빠가 생전에 막역하게 지냈던 분들이 "시신이 없어서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믿었던 만큼 충격이 컸다. 아빠가 돌아가신 직후의 상황과 우리의 언행을 떠올리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우리의 설명에 무엇이 부족했는지. 이러한 과정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의식적으로 잊으러 노력했던 기억을 불러와야 했기 때문이다. 시신기증과 장례식 준비 전후의 상황을 감정을 완전히 분리한 채 기억해 내기란 불가능했다. 당시의 충격과 슬픔도 뒤섞여 몰려오기 시작했고, 이윽고 감정은 기억의 끈을 통해 원인을 찾고자 했던 우리를 삼켜버렸다. 순식간에 나는 나 자신을 "부모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미숙하고 바보같은 인간"으로 치부했고 다시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그렇게 밀려오는 감정에 휘둘려 나의 잘못을 찾고 또 찾던 중, 문득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분명히 아빠의 뜻에 따랐다. 장례식장에 아빠의 지인과 친구분들이 함께해주지 않았지만 아빠가 생전에 좋아하시던 것들을 준비해 최대한 아름다운 이별이 되도록 애썼다. 그 과정 안에서 극단으로 치닫기까지 했던 감정을 추슬렀고 고인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보자고 서로를 다독였다. 비록 아빠가 알고 지낸 모든 분들이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아빠가 하늘에서 보신다면 흐뭇해하실 만한 시간이었다.
아빠가 늘 꿈꿔왔던 "장례식"을 타인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몇 마디로 퇴색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아빠의 뜻을 관철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는 중에 약간의 마찰도 있었다. 아빠의 지인들은 우리 가족의 언행을 '무례'라고 인식했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오해의 여지를 남겨 두고두고 "시신이 없어 장례도 치르지 못한 이"로 기억되게 하는 것보다는 낫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일반적인 틀을 벗어나는 선택에 조금은 유연해지길.
표면적인 것만 보고 판단하기보다는 짧은 시간만이라도 진지하게 타인의 입장에서 배려해 주길.
그게 그렇게 힘들었을까?
혹 우리가 타인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랐던 건 아닐까.
어떤 일이든 오해는 동반되기 마련이니 좋게 좋게 넘어갈 껄 그랬나.
좁은 시골 사회에서 너무 까칠하게 대응했던 건 아닐까.
여전히 여러 생각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렇지만 아빠는 "장례도 치르지 못한 이"가 아닌,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세상과 이별한 이로 기억되게 하고 싶다.
고인과 유족의 소망이 이러할진데 애써 자신들의 고정관념을 고집해야 했을까.
아빠 지인들의 오해는 여전히 우리를 힘들게 한다...
응당 감당해야 할 일인 건 알지만, 소중한 이의 부재(죽음)과 관련된 일이라 그런지 마음을 털어내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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