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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나 Jan 28. 2022

과거형을 망각한  말 습관

아빠가 돌아가신 지 316일이 지났다.

아직 1년을 채우지 못했으니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표현이 적당할 수도 있겠지만

'벌써' 1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고 하면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한 긴 시간을 견뎌온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소중한 이의 부재를 의식하며 내 앞에 놓여있는 시간들을 어찌 견딜까 했던 지난날이 무색할 정도로

남아있는 이들은 또 나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인데 때로는 나의 들숨과 날숨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지난날 지극히 당연하다 여겼던 '살아있음'을 아빠도 안 계시는데 이렇듯 이어가도 되는 것일까.

다른 이도 아닌 나에게 생명을 준 두 명의 존재 중 한 명이 생을 마감했는데….

특별할 것 없는 몸짓이, 생각이, 먹고 배설하는 그 모든 행위가 죄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산 사람이라면 피해 갈 수 없는 그 모든 행위가 불현듯  나의 의식을 짓누른다.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 육신과 영혼을 맡기는 일이 사치스럽고 또 죄송하다는 걸 왜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는지.


죽은 이는 남아 있는 이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했던가.

이런 표현을 딱히 의식해 본 적이 없는데도 우리의 본능은 망자가 살아갈 환경 혹은 조건 등을 만들어 놓는 것 같다.

우리의 기억 속에, 마음의 공간 어딘가에.  


이를테면 '과거형'을 쓰지 않는 말 습관 또한 그러한 것 중 하나가 아닐까.




우리 가족의 대화 중 아빠를 표현하는 단어에 과거형이 없다는 걸 알게 된 건 며칠 전이다.

내 안의 무엇이 작용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날 나의 무의식은 ‘아빠와의 이별’을 완벽히 망각하고 있었다.

엄마와의 외출 준비를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던 중


‘아 맞다! 아빠가 우리 외출 사실을 모르시지. 연락드려야겠네. 안 그러면 또 전화를 계속하실 게 분명하니까.’


라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찾기에 열중했다. 침대, 책상 위, 가방 안을 한참 뒤적거리던 중에 깨달았다.

‘아… 아빠는 더 이상 안 계시지….’


나의 이러한 언행을 의식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 번 의식하고 나니 이후 아빠와 관련된 나의 모든 생각과 말에 집중하게 됐다.

그렇게 알게 된 것이 “과거형의 부재”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차 안에서)

나 : 엄마, 우리 오늘 빵은 어디서 사지?

엄마  : 지난번에 산 그 가게 식빵이 맛있더라. 거기서 사자.

나 : 식빵만 사면 될까? 다른 종류 빵은 안 사도 되는 거야?

엄마 : 그러네. 니 아버지는 식빵만 사 가지고 가면 화낼 거야. 그렇지?


(커피를 마시다가)

엄마 : 어제 그 일일연속극 봤어?

나 : 응, 나는 실내 자전거 타면서 봤는데 엄마는 그때 뭐하고 계셨는데?

엄마 : 난 멍멍이랑 산책 다녀왔지.

나 : 엄마, 어제 방영분은 안 보셔도 돼요. 아빠가 정말 싫어하시는 전개 방식이라서 엄마도 보면 재미없다고 하실지 몰라요.


(아빠 물건을 정리하던 중)

나 : 우와 아빠는 만년필을 몇 자루나 가지고 계신 거야!

엄마 : 그거 말고 또 있을걸? 일본에서 니 동생이 또 사 줬잖아.

나 : 진짜? 이렇게 많으면서 나 한 자루도 안 주시다니.

엄마 : 니 아버지가 만년필 욕심이 많아. 저쪽 서랍 열어봐. 만년필 잉크도 많이 가지고 있다니까.



엄마와 나의 대화에서 아빠는 '회상'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존재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유효하지 않다는 뜻을 내포하는 ‘과거형’으로 아빠의 성향이나 언행을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


'너네 아버지는 식빵만 사 가지고 가면 화냈을 거야' 라든가.  

'아빠가 정말 싫어하셨던 전개 방식이라서....'

'너네 아버지가 만년필 욕심이 많았어. 저쪽 서랍 열어봐. 만년필 잉크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니까.'


어색해서, 혹은 아빠를 완벽히 과거에 존재했던 인물로 표현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러한 말 습관을 의식한 이후, 이렇게 말하고 표현해도 되는 것인지, 우리나 너무 과거에 스스로를 붙잡아 두는 것은 아닌지, 가까운 이를 잃었다는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고쳐야 하는 습관은 아닌지. 손가락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생각을 거듭하고 또 거듭했다.

하지만 나의 끈질긴 고민과 달리 평생에 걸쳐 형성된 언어 습관을 단번에 고치기가 힘들었다.

표현을 정정해야겠다는 계산보다는 습관이 앞섰다. 지금도 그 속도를 이길 재간이 없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몸에 새겨진 한 존재를 지우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오늘도 그렇게 아빠는 나와 엄마의 대화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오늘도 그렇게 우리는 아빠의 존재를 느끼고 또 공유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빠와의 완벽한 이별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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