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을 향한 늙음의 상상이 만들어 낸 탐심
비톨트 곰브로비치 <포르노그라피아>
이어령 선생이 '소설은 인간의 숨겨진 욕망의 민낯'이라고 했던가.(찾아보니 아니다. 아마 내 생각인 거 같다) 유난히도 기분이 울적하고 삶이 무료할 때에 책장에서 <포르노그라피아>를 발견했다. 책을 꺼내 책장을 넘기기도 전부터, 나는 울적함과 무료함에서 살짝 나올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이 책은 내 상상의 그 너머였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작자의 이름과 같은 비톨트는 프레데릭과 함께 폴란드의 시골마을을 찾는다. 그곳에서 소년 카롤과 소녀 헤이나를 만난다. 그 둘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두 지식인은 둘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연결하고 싶어 진다. 그런데 헤이나에게는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에로티시즘을 완성하기 위해 음험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한다. 그리고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단순한 이야기 속에는 나의 숨겨진 욕망 그 너머의 사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 이 이야기는 결핍에서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에게 점령당한 폴란드. 그리고 그곳의 지식인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매주 화요일마다 크루차 거리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모여들었다. 거기서 우리는 늘 하던 대로 독한 술을 홀짝거리면서 예술에 대한 해묵은 대화들을 펼쳐놓곤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여전히 화가이고 작가이고 사상가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p.8
자신의 사상을 억압당하고 표현할 수 없는 지식인들. 그들은 공허해지며 스스로를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표현의 자유를 상실한 지식인에게 시골마을은, 돈을 벌기 위해 그곳을 찾은 비톨트와 프레데릭에게, 오히려 그동안 표현하지 못한 자신들의 욕망을 마음껏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무대가 된다.
# 아름다운 육체를 향한 애욕, 에로티시즘
인간에게 숨겨진 욕망이란 무엇인가. 유체적 애욕, 성욕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름다운 육체를 향한 탐심은 기준이 다를 뿐 동서고금과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는다.
그녀의 등과 뒷목의 선은 여전히 소녀의 것이었다. 내 눈은 그녀의 목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 그녀의 목이 조금 전에 보았던 또 다른 목과 아주 자연스럽게 만나는 게 보였다. 그녀의 목과 또 다른 목이 내 눈앞에 나란히 있었다. 그렇다. 두 개의 목. 이 둘은... p.33
비톨트, 화자는 (소년) 카롤의 뒷모습에 혼미해지고 (소녀) 헤이나에게 현혹된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비톨트는 그것을 그 둘 사이의 애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젊음(소년과 소녀)을 향한 늙음(비톨트)의 갈망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젊음을 향한 해결되지 않는 목마름을, 그들은 지식인이 가진 특유의 상상력으로 그것을 창조해 나간다. 에로티시즘
# 에로티시즘은 남녀의 생식기에서 생성되는 섹스 호르몬의 상호작용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이며 젊은 육체를 향한 열망이다.
젊음과 늙음, 세상을 앞에 두고 있는 젊음과 살아온 시간이 켜켜이 쌓인 늙음. 비교의 대상이 될는지 모르겠다. 양자택일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혹 늙음을 선택할 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순간의 감정적 오판일 것이다.
젊음은 매혹적이다. 젊은 청춘들의 맹목적인 웃음소리와 땀방울 그리고 숨소리는 달콤하다. 그것은 어설프지만 그것이 바로 젊음이 매력적일 수 있는 이유이다.
젊음과 늙음은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대응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름다움은 젊음의 미성숙, 추함은 늙음의 성숙으로 표현할 수 있다. 늙어간다는 것은 살아온 시간들이 인생에 켜켜이 쌓여있는 것을 말한다. 그 속에는 삶의 지혜가 묻어 있을 수 있다. 그 지혜는 세상을 살아오며 겪은 악함과 추함들로 인해 얻은 것이다. 반면에 젊다는 것은 세상이 그 젊음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고, 세상의 추악한 면을 겪어보지 못한 미성숙, 순전함을 의미한다.
미성숙은 아름답다. 소녀, 소년의 태를 벗지 못한 젊은 청춘들을 그래서 매혹적이며 아름답다. 여성으로서의 삶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깨친 여자는 이런 류의 아름다움에서는 점차 멀어진다. 남자 역시 매한가지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가끔은 젊은이들이 모르는 삶의 정수를 깨닫기도 하고 깊어지는 감성으로 더할 나위 없이 삶에 매료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위안은 될지언정 만족은 될 수 없다. 화자(비톨트)와 프레데릭은 아름다움을 향한 늙음의 탐심을 부끄러워 하면서도 그것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젊다는 것, 그것은 미성숙하지만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빠져들 수 밖에 없다.
책 말미에 작가의 말이 나온다. 작가의 손 끝을 떠난 책은 더 이상의 작가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책의 이해는 작가의 설명이 아니라 독자의 몫이다. 그래도 작품의 해설보다는 확실히 덜 현학적이지만 괜히 간섭받는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