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써 포장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절대 진리일 수 없다.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나의 책 읽기는 아주 무겁다. 언제부턴가 지독하게 책 읽기에 매달리고 있다. 하루에 정해진 만큼 읽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읽고자 한 분량을 다 못 읽은 날은 진도가 안 나가서, 계획한 분량 그 이상으로 읽은 날은 지나치게 읽어서 무겁다.
나는 '상처가 생각으로 승화되면 그 상처는 상처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말을 애정 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며 삶이 주는 슬픔을 승화시키기 위해 읽는다. 그리고 인생이, 내가 사는 삶이, 인간이, 운명이 무엇인지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하다. 내가 궁금한 것은 누군가에게 묻는다고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님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기에 내가 찾고자 한다. 찾으면서 책 속에는 답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몹시 힘들고 우울할 것이다.
작금의 독서는 나에게 이런 색깔이 짙다고 본다.
책 속에 묻혀있는 동안만큼은 평온하지만 책을 읽지 않는 순간은 공허하고 무료하다. 이 금단현상을 막기 위해 책을 손에 들고 다닌다. 남이 보기에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나 책 한 권이 나에게 주는 효력이 그러하다.
이것이 불교에서 일컫는 고통스러운 윤회의 업보라면 너무 과한 비유일까.
* 윤회(輪廻)와 해탈(解脫)
싯다르타는 구도자(求道者)이다. 진리와 궁극의 깨닮을 구하고자 가족을 두고 친구 고빈다와 함께 사문(沙門)의 길을 걷는다. 사문의 길을 걸으며 내면의 침잠이, 단식이, 육체로부터의 이탈이, 중생(衆生)들이 술에 취해 잠시 마음의 평온을 가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자아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며, 그것은 자아 상태의 고통으로부터 잠시 동안 빠져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인생의 고통과 무의함을 잠시 동안 마비시키는 것이야. p. 32
싯다르타는 윤회의 업을 끊을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해탈의 경지에 이른 고타마를 찾아간다. 세존 고타마와의 만남을 통해 해탈은 가르침을 통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깨달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에 싯다르타는 편력의 길에 들어선다. 그 편력의 길에서 싯다르타는 기생 카밀라, 상인 카마스와미, 아들, 뱃사공 바주데바 등을 만나게 된다. 순정과 욕정, 부와 권력, 권태와 태만, 탐욕과 중독, 사랑과 부정(父情) 등 중생들이 겪는 일상을 편력을 통해 깊이 경험한다. 그 경험과 욕구의 범람은 싯다르타로 하여금 내면의 자아를 부정하고 증오하게 만든다. 만족하고, 권태하고, 욕망하고, 무너지고, 갈망하고, 허망하는 인간의 삶에서 싯다르타는 해탈의 길에 결국 이르게 된다.
해탈에 이르게 된 싯다르타는 친구 고빈다를 만나게 되었을 때, 진리란 말로 설명할 수 없으며 말로 설명되어지는 건 진리가 아님을 설파한다. 고빈다는 충격에 휩싸인다. 그러나 싯다르타의 얼굴에서 고빈다는 그가 진정으로 구도의 끝에 도달하였음을 본다.
*말의 허상과 삶의 진실
쓰레기는 예쁜 상자에 담아도 쓰레기이며 보석은 신문지로 싸더라도 보석이다, 고 하지만 우리는 그 포장에 쉽게 현혹된다. 신문지에 싼 보석은 보석으로 보이지 않고, 예쁜 상자에 담은 쓰레기는 보석으로 보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말이 그러하다. 생각의 기본 단위가 말이라고 하지만 모든 생각을 말로서 표현할 수 없다. 말로 표현되는 순간 그것은 나의 생각이 아니라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이 되고 만다. 그러니 말(언어)은 생각의 기본 단위로서는 충분히 그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말(가르침)로써 진리를 찾는 도구로는 충분하지 않다.
말이란 신비로운 참뜻을 훼손해 버리는 법일세. <중략> 어느 한 사람에게는 소중한 보배이자 지혜처럼 여겨지는 것이 어떤 다른 사람에게는 항상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린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나는 동의하고 있어. p.211
말의 허상을 깨달은 싯다르타는 그래서 편력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말의 불투명성, 그 왜곡으로부터 진실을 찾기 위해서.
나는 나 자신의 육신의 경험과 나 자신의 영혼의 경험을 통하여 이 세상을 혐오하는 일을 그만두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이제 더 이상 내가 소망하는 그 어떤 세상, 내가 상상하고 있는 그 어떤 <중략> 내가 관능적 쾌락, 재물에 대한 욕심, 허영심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수치스러운 절망 상태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p. 209
쓰레기가 냄새를 풍기고 보석이 그 빛을 발하는 것은 말의 허상이 벗겨지면 삶이, 그 본질이 스스로 그 신비로움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진리는 그 빛과 아름다움을 스스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포장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그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책 읽기가 많이 부끄러웠다. 나의 책 읽기는 윤회의 업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구하고자 그리고 찾고자 하는 것은 책상 위에 놓인 그 책들이 아니라 저 밖의 세상과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을 책에서 깨닫게 되었는 것은 나의 기쁨이지만 여전히 세상과 사람이 두려워 이곳에 머무르는 것은 삶의 진실을 말의 허상으로 포장하려는 것과 같다. 글은 나의 생각의 모순이고 삶은 나의 생각의 진리인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