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문학적 소양이 부족해서 문학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주저하지만 애정하는 작가를 말할 때는 박경리, 박완서의 글을 단연 최고로 꼽는다. 그리고 난 "좋은 글은 작가의 경험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좋은 글이란 작가의 진실과 진솔한 마음이 들어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진실을 담은 글에서는 조악한 인간의 삶과 운명에 애잔함마저 느낄 수 있다.
*보편적 불행에서 얻는 위안
작년 여름에 한 후배가 연애에 실패하고 나에게 술을 한 잔 사달라고 했다. 청춘의 과실이 영글어가는 것이기에 당연한 과정임을 알지만 실연의 아픔을 겪어본 먼저 된 사람으로 마음이 아팠다. 당연히 그러자고 했지만 후배의 얼굴에서 큰 위로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말없이 있던 다른 후배가 갑자기 화색이 되어 말했다. 말하지 못했는데 사실 자신도 지난주에 실연했는데 갑자기 위로받는 것 같다고 했다. 순간 그 둘의 불행은 각자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보편적인 불행이 되었고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다.
우스갯소리지만 나중에 한 명이 먼저 연애에 성공한 나머지 한 명이 더 슬퍼지긴 했다.
인간의 삶에는 피할 수 없는 숙명적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불행도 피할 수 없다. 늘 불행 앞에서 우리는 외롭고 두렵고 좌절한다. 그 불행이 나만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옆집의 중병보다 나의 감기가 더 고통스러운 것 역시 그 불행이 나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 혼자 놓이는 것, 불행은 그 외로움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저의 아버지는 고아로 자라셨어요. 할머니는 자살을 하고 할아버지는 살인을 하고, 그리고 어디서 돌아갔는지 아무도 몰아요. 아버지는 딸을 다섯 두셨어요. 큰딸은 과부, 그리고 영아 살해범으로 경찰서까지 다녀왔어요. 저는 노처녀구요. 다음 동생이 발광했어요. 집에서 키운 머슴을 사랑했죠. 그것은 허용되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부터 반대했으니까요. 그는 처녀가 아니라는 험 때문에 아편쟁이 부자 아들에게 시집을 갔어요. 결국 그 아편쟁이 남편은 어머니와 그 머슴을 도끼로 찍었습니다. 그 가엾은 동생은 미치광이가 됐죠. 다음 동생이 이번에 죽은 거예요. 오늘 아침에 그 편지를 받았습니다. p.409
가슴이 미어졌다. 한 개인의 고통과 불행이 아닌 한 가족사의 비극적 멸망을 읽으며 책장을 넘기기가 버거웠다. 그럼에도 이 불행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나의 불행이 개인적이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위안을 얻었다. 박경리, <김약국의 딸>은 비극적 문학의 미학이자 독자의 상처를 치료해줄 수 있는 최고의 위로가 아닐까 한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희망
때로는 희망은 인간을 희롱하고 고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것, 그것이 희망이 아닐까.
<김약국의 딸>에서는 수많은 죽음이 숙명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죽음이 있으면 당연히 탄생 역시 존재한다. 죽고 사는 이야기, 그 삶 속에서 불행과 행복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죽음이 길가의 돌멩이처럼 흔해 빠졌기 때문이다.
숙명적 불행의 용빈에게 선교사 미스 케이트는 "용빈이, 믿음을 잃지 말아요!"라고 한 줄의 편지를 남긴다. 그 편지에 용빈은 한숨을 쉬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희망이란 인간의 불행 앞에서도 삶을 포기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김약국의 딸들>에서, 억지 분홍빛 희망이 아닌 차마 포기할 수 없는 적나라한 희망을 보며, 나는 내 삶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