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나는 내가 만든 조잡한 문구인 "불확실한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희생하지 말아야 한다."를 애정 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며, 이 조잡한 말장난을 곱씹어 생각했다.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무수히 많은 명사들이 애정 하는 책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좋아하는 책이다. 하지만 내 주변에서 이 책을 읽고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무엇이 위대한 거냐고 말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원시시대 이후 고대사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항상 "돈"이었다. 권력, 종교 역시 돈에 의해 움직였다. 농업혁명으로 인해 잉여자원이 생기고 계급이 생겼다. 대략 7000년 전부터 우리에게는 계급이 생겼다. 그 계급을 구분 짓는 것은 잉여자원 즉 돈이다.
지금의 돈은 그 형체가 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물건을, 동전을, 지폐를 반드시 사용했어야 하지만 지금은 가상의 공간에서 돈을 주고받는다. 형체가 사라지고 있는 지금의 <돈>은 권력과 종교에게 힘을 부여하던 과거를 거쳐 권력과 종교 그 자체가 되어 가고 있다.
❖ 1920년대의 미국 사회는 <돈>의 시대였다.
<위대한 개츠비>는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돈의 형태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 가치가 최고조를 향하고 있던 시대였다. 중세의 봉건제도는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완전히 무너진다. 산업혁명으로 생긴 수많은 잉여자원은 갈 곳을 잃어버렸고 그 자원을 소모하기 위해 서구 열강은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뒤늦게 식민지 건설에 참여하려던 독일은 더 이상 남은 시장-잉여자원을 소비할 식민지-이 없음을 알고 세계 대전을 일으키게 된다.
전쟁은 그동안 쌓여만 가던 세계의 잉여자원을 모조리 소비하고 근대의 초기 자본주의의 대성공을 이루게 한다. 전쟁 이후 미국의 증시는 폭등하게 되며 술은 넘쳐나고 각종 범죄가 기승을 부렸다. 그런 거품경제는 1929년 세계경제 공황 전까지 부풀어 오른다.
개츠비가 살았던 시대는 바로 <돈>의 시대였다. 물론 이 시대를 사람들은 재즈시대, 금주법의 시대라고도 한다.
❖ 이 책을 세 번 읽을 것이 아니라 세 번의 경험을 겪어봐야 한다.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것은 연애 전이었다. 그때 대학생들이 그랬듯이 <상실의 시대> 읽고 처음 알게 되었다. 음울한 와타나베가 사랑의 의미를 갈구하며 탐독하던 소설이기에 <위대한 개츠비>의 위대함은 사랑의 숭고함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다. 연애소설로는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위대하지도 않았다.
두 번째 읽은 것은 연애 중이었다. 첫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개츠비를 보며 그 위대함은 사랑의 희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니 착각이었다. 그리고 그때도 역시 재미가 없었고 위대하지도 않았다.
세 번째 읽은 것은 실연 후였다. 그것도 가슴 아픈 실연 후 말이다. 실연 후에는 마음이 복잡하다. 한때 나에게 세상은 한 여자와 그 여자를 제외한 의미 없는 여자로 분류가 가능했다. 그런 여자가 사라진 세상은 의미가 없는 여자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 여자를 되찾고 싶었다. 그 여자가 주었던 시간이, 감정이, 달콤한 목소리가, 부드러운 손길이, 따뜻한 미소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나는 그 여자를 되찾고 싶은 게 아니라 그때 그 순간을 원했다. 헤어진 그 여자를 당시에는 사랑했는지 몰라도 그 여자가 떠나고 난 다음엔 그 시간만을 갈망했다. 나의 이러한 실연의 경험은 <위대한 개츠비>를 연애소설 읽는데 충분히 도움이 되었고 재미 그 이상을 주었다. 그리고 나름의 위대함의 의미를 찾았다.
<상실의 시대> 나가사와가 와타나베에게 세 번 읽어야 한다고 했던 그 의미가 이런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세 번 읽었고 다시 더 읽을 계획이다.
❖ 데이지를 통해 엿보는 페미니즘
2017년 서점가에 단연 돋보이는 책들은 페미니즘 관련 서적이다. 그중에서 단연 82년생 김지영은 수많은 여성 독자의 공감을 얻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나는 정치철학에는 문외한이다. 내가 정의하는 페미니즘은 다소 위험하거나 근거가 불명확하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에 대해 검색도 하지 않고 그 뜻을 정의하는 건 나의 비장함이다. 아니 무모함이겠다. 페미니즘은 권력의 이동이다. 이 권력은 돈의 이동을 의미한다. 고대사에서부터 권력은 대체적으로 남성의 권한이었다. 돈을 가진 남성은 권력을 가졌으며 돈을 가지지 못한 여성은 남성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권력을 가지지 못한 여성은 사회로부터 남성에게 헌신하는 것이 미덕인냥 세뇌받으며 살아왔다. 심지어 여성에게는 섹스의 권력조차 없었다. 물론 마님과 돌쇠의 이야기는 동등한 사회적 신분이 아니니 넘어간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수많은 독자들은 데이지를 욕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개츠비를 그저 자신의 삶에 이용하고 한낱 소모품과 장식품으로 밖에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츠비는 다소 불쌍하게 바라본다. 그러나 이 역시 <돈>이라는 권력의 관점에서 보면 데이지의 행태는 일면 이해가 간다.
데이지는 무력한 인물이었다. 남편 뷰캐넌의 외도를 알지만 떠나지 못한다. 남편을 떠나 혼자 생존하기에 아무런 능력이 없다. 그것은 돈이 없기 때문이다. 돈이 없는 것은 권력이 없는 것이다. 물론 무력한 것은 데이지의 탓이다. 그러나 데이지는 여성이기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여성은 무력해야 했었다. 그것이 아름다움이었다. 무력한 데이지는 개츠비와 톰 사이에서 쟁취되어야 하는 전리품에 지나지 않았다.
❖ 위대한 개츠비에서 무엇이 위대하냐고 묻는다면
아메리칸드림은 미국인의 이상을 말한다. 자유와 평등이 숭고한 가치를 발현하는 세상 말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아메리칸드림은 미국에서 잘 사는 것으로 더 많이 쓰인다. 개츠비는 아메리칸드림을 이룬다. 개츠비의 이상은 <돈>이었다. 그 돈은 개츠비가 놓쳤던 데이지를 되찾을 수 있는 권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그 이상을 이루기 위해 불법적인 사업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개츠비의 삶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개츠비는 자신이 가진 부와 권력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고 주말 파티에서 늘 고독하고 외롭다. 다시 말하면 불확실한 미래, 데이지를 되찾겠다는 그 환상과 집념으로 인해서 현재를 희생시키고 만다. 그럼에도 개츠비의 유일한 친구인 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니,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내가 잠시나마 인간의 짧은 슬픔이나 숨 가쁜 환의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던 것은 개츠비를 희생물로 이용한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 때문이었다. p. 11
"그 인간들은 썩어빠진 족속이오." 나는 잔디밭 너머로 소리쳤다. "당신 한 사람이 그들을 모두 합쳐놓은 것만큼이나 훌륭합니다." p.217
개츠비가 가진 이상은 <돈>이었다. 그리고 권력이었다. 사랑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밀주를 통해 돈을 벌었다. 목적도 수단도 전연 존엄하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며 꿈도 이상도 없이 사는 인간들은 개츠비 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바로 데이지와 톰이다.
그렇다면 목적도 수단도 그 이상만 높다면 어떠하더라도 괜찮단 말인가. 아니다. 내가 느낀 것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살아가게 하는 힘은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돈이자 권력일 수 있지만 말이다. <위대한 개츠비> 무엇이 위대하냐고 묻는다면, 개츠비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삶을 추동하는 힘인 <이상의 존재>가 위대하다고 말하고 싶다.
"불확실한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희생하지 말아야 한다."를 곱씹어 생각하며, 나는 이상도 꿈도 없이 그저 공기 중에 부유하는 먼지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