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악인과 선인 없다는 자연 세계에서 "용서"와 "존경"을 발견한다.
오래간만에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 자판 위에 손을 얹었다. 한 달 넘게 읽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펼쳐보며 밑줄과 긁적인 메모를 훑었다. 늘 생각하지만 글쓰기란 참으로 고된 작업이다. 책을 읽으며 가졌던 수십 가지 생각의 파편을 모아 모아 하나의 글로 완성하는 작업, 그것은 고되지만 무명의 독서가에게 주어진 최고의 즐거움이자 의무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수영을 배운 지는 30년이 넘었다. 근래에는 수영복 입기가 부끄러워 수영장에 안 가는 배 나온 아저씨가 되었지만 혈기왕성한 시절에 달랐다. 물살이 다소 거센 강에서 수영을 하다 위험한 일을 겪을 만큼, 체대생들에게 수상안전법을 강습할 만큼 수영이란 운동에 심취했었다. 그리고 한여름에는 못의 가장자리를 원형 하거나, 바다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수영을 하고, 시야가 확보되면 깊은 바다에서도 혼자 물놀이를 즐기곤 했다.
오랜 기간 수영을 하면서 깨달은 한 가지는 결단코 물살을 거스르지 말라는 것이다. 그곳이 파도가 거센 곳이든, 파도가 잔잔한 방파제 안이든, 심지어 실내수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영을 즐기는 사람은 고작 몇 초를 머물기 위해 물에 몸을 담그지 않는다. 적게는 50분에서 많게는 몇 시간을 물속에서 머물게 되는데 수영이란 물살을 가르며 역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물살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오랫동안 수영을 즐길 수 있는 제1원칙이다.
명상록을 읽으며 인생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삶의 유일한 목적은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것들을 우린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 짓는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 그리고 착한 사람, 나쁜 놈 즉, 선과 악으로 말이다. 그런데 자연에는 선과 악이 없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삶을 만끽하기 위해선 내가 자연의 일부분임을 망각해선 안 된다.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가는 짐승들에게는 어떠한 선악에 대한 도덕률이 없을 것이다. 물론 확언은 자제한다. 내가 아는 세상이, 그가 인식한 세상이 전부는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자연은 선과 악이 없는 태고의 모습이다. 그 모습이 한편으로는 잔인한 아비규환 내지 카오스를 연상케 하지만 그것이 자연임을 부인할 수 없다. 카오스는 자연이 끊임없이 변모해야 하는 연속선 상에서 어쩔 수 없는, 지극히 당연한 과정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가진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독립한듯 보이지만 기실 그렇지 못하다. 우린 "지배적 이성"으로 인간이 자연의 일부분임을 기억해내야 한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들 역시 자연의 일부분이다. 인간의 행동을 "이성"적 사고로 판단한다면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할 수 있겠지만 "지배적 이성"으로 판단한다면 선인과 악인이 아닌 그저 자연의 순환에서 발생하는 파괴와 상실 그리고 변화가 아닐까. 내 이웃의 행동에 도덕률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아비규환이 될 텐데 그것은 어쩌면 아름다움의 절정이자 코스모스가 아닐까.
만물은 변한다. 너 자신도 끊임없이 변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파괴를 겪고 있다. 우주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p. 148.
인류는 늘 대척점에 있는 극단의 세력 간의 다툼으로 진화했다.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 그 끝없는 분열은 고통스럽고 불안하며 공포스럽지만 그 분열은 결국 하나의 세상을 세상을 탄생시키고 만다. 우리의 세상은 결코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기 때문이다. 변화 그것은 카오스이며 코스모스이다.
세상에 악행이, 악인이 없단말인가. 얼마 전 출소한 소아성폭행범이 악인이 아니면 누구란 말이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호의호식하는 높으신 양반이 그렇다면 선인이란 말인가. 아니다. 선인도 없다. 수단 톤즈에서 기적 같은 삶을 사신 고 이태석 신부가 선인이 아니란 말인가. 그래. 어처구니없지만 세상에는 선인과 악인이 없으며 자연의 일부분으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부분만 존재한다. 우린 우리에게 주어진 몫을 수행하며 자연의 일부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일부분으로 사는 방법이다.
하나 물어보자. 그렇다면 세상에 태어나길 누군가는 어떤 이를 죽이기 위해 태어나고, 몸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고, 객사하거나 몹쓸 병에 결려 병사하려 태어났단 말인가. 자연에는 감정이 없으니 그것에 대해 어떠한 판단을 내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럼에도 우린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력하게 느낄 수 있으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물살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물에 몸을 맡기는 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물살을 거스르며 역영을 하는 이가 있다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런 이를 혁명가로 보자. 혁명가, 개혁가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혁명과 개혁으로 세상은 달라지고 우리가 원하는 유토피아가 되었는가. 자유, 평등, 박애를 주창했던 프랑스 대혁명의 로베스 피에르, 나폴레옹이야말로 혁명가이자 개혁가일 텐데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촛불집회로 대한민국을 새롭게 세운다던 정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들 역시 역사의 시류에 잠깐 빛나는 자갈돌일 뿐 물살을 거스르지는 못한다. 자연이 변화하듯 인류 역시 변화할 뿐이지 그것이 물살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우주의 원인은 급류같아서 모든 것을 휩쓸어간다. 정치에 관여하며 거기서 철학자연하는 저 사람들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자들인가? 모두가 코흘리개들이다. 인간이여,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자연이 너에게 요구하는 것을 행하라. p.151.
이쯤 되면 참 씁쓸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연에 복종하며 사는 것 밖에 없다니 말이다. 자연의 일부분으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는 것 그것만이 기쁨이라니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악인과 선인이 없다는 자연 세계에서 "용서"와 "존경"을 발견한다.
"나보다 더 강한 것이 길을 막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것을 행하지 못하는 원인이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므로 괴로워하지 마라." 하지만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인생은 살 가치가 없는걸요." 그렇다면 목적을 이루고 죽은 사람처럼 담담하게 인생을 떠나되, 네 길을 막는 장애물들을 용서하라. p.137.
선과 악을 구분하기보다는 그들을 용서하고 존경하는 것,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야 할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선과 악을 구분하기보다는 <용서와 존경>을 통해 사회를 수용한다면 물에 몸을 맡기듯이 삶을 만끽하며 오랜 기간 조금 더 인격적인 삶을 영위하지는 않을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본다. 세상에 태어난 우리는 연극에 출현한 배우처럼 각자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 역할이 끝나는 그때에 연출자는 무대에서 우리를 부를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물에 몸을 맡기듯이 자연에 몸을 맡겨야 한다. 삶이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한번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연의 섭리가 무엇인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며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찾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비록 거대한 혁명의 주체가 아니면 어떠한가. "삶이란 전쟁이며 나그체의 체류이고 사후의 명성은 망각"이라고 하지 않는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을 읽으며 내가 가진 생각의 파편을 정리해보았다.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내가 책을 오독했다면 꼭 알려주길, 누군가의 죽비가 나의 어깨에 진심으로 닿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