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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May 24. 2022

욕심

잡소리

  나는 이어령 선생을 좋아했다. 신용복 선생도 좋았고 하기사 그분들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알면서 좋아하지 않기는 어려울 테다. 그분들을 애정 하는 것이 나의 지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성인의 말에는 현재성이 있다. 그들의 말이 힘이 되려면 지난 것들의 향수가 아닌 현재성이 있어야 한다. 현재성이란 지금, 바로 여기에 그것들이 얼마나 유효한가를 뜻한다. 은유로 쓰인 잠언집이 시대가 변해도 사람들이 찾는 건 그때마다 해석의 여지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고전이 일이천 년 지나도 서가에 꽂여 있는 건 그때의 문제가 아직도 그것이 유효하다는 것이다. 현재성을 잃어버린 글들은 하나의 박제물로 보관된다. 역사적이라는 것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죽지 않고 살아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죗값을 속죄하기 위한 완성이었고 부활은 죽음의 완성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죽음을 완성이라고 볼 수 있을까? 예수야 신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죽었으니 우리 인간들과는 문제의 차원이 다르다. 백년전쟁의 판도를 바꾼 잔다르크는 수차례의 화형으로 뼈도 안 남았는데 아직도 죽지 못하고 여전히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 잔다르크의 명예를 복원한 프랑스의 황제나 유관순을 독립투사로 만든 시대적 상황은 비단 그때만의 일은 아니다. 비단 먼 유럽의 잔다르크만의 일일까. 이순신의 숭고한 정신을 자신의 정치적 욕망에 이용하고 대중이 현혹되는 건 우리 사회가 여전히 이순신을 보내지 못하는 궁함 때문이다. 어쩌면 이순신, 잔다르크 같은 영웅이 죽어서도 편치 못한 건 그들이 살던 시대와 지금이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마저 바뀐 건 아니다. 인간 군상의 모습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떼를 지어 옥신각신하니 갈등과 반목 그리고 화해는 삶의 당연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죽고 나서 이내 그분의 책들을 선전하는 건 보기가 아무래도 불편하다. 그의 말들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어느 정치인이나 유명인이 죽어서 그들의 책이 불티나게 팔리는 게, 그의 말이 현재성을 가져서 그런 거라면 왜 그때는 외면했을까. 죽자마자 그들의 말이 현재성을 가지고, 살아서는 역사성을 가지는 그런 역설은 거짓일 거다. 어쩌면 또 다른 만남을 방해하고자 하는 나의 시기심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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