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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Dec 02. 2021

애도할 시간



74日






일전에 쓴 적이 있지만 우리 동네는 죽음과 아주 가깝다. 근처에 큰 화장장이 있다. 매일 아침 검은 리무진과 대형버스가 그곳을 드나든다. 외고모 할머니께서 영면하시고 발인하는 날. 엄마, 아빠가 승화원을 들러 우리 집으로 오셨다. 굵은소금을 대차게 맞으신 두 분이 믹스커피 한 잔이 드시고 싶다고 했다.



“요즘은 화장을 지켜볼 수가 없더라. 할머니 들어가시고 문이 닫히자마자 ‘다 됐습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세요.’ 하더라고.”



엄마는 할머니의 마지막을 보고 싶어 하셨다. ‘승화원’이라는 화장장 이름답지 않게, 고인이 하늘로 훨훨 날아올라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씁쓸하셨는지, 달달한 믹스커피를 두 개나 넣어서 진하게 타 달라고 하셨다. 그 이야기에 나도 입이 쓴 것 같다.



사람이 한 줌 재로 돌아가는 몇 시간은 상실을 뚜렷하게 목도하는 시간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큼 확실한 증명은 없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3일 전만 해도 실체로 존재하던 한 사람이 현현히 사라지는 것을 볼 권리- 그것마저 상실한 가족들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다 됐습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때가 오기는 올까.



아이가 하던 놀이 수업이 2주 후면 종결된다. 아이의 선생님은 적어도 종결 한 달 전부터 아이와 마지막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지난 2주 동안 선생님과 아이는 이별을 받아들이기 위한 소통을 하고 있다. 애착이 형성되어있던 선생님이라 아이는 수업의 마지막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최소한 선생님의 배려와 노력을 알아줄 것이다. 나머지는 아이의 몫이지만 나는 곁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아이의 몫을 나눠지고 싶다. 하물며 죽음이야! 



모든 종류의 상실을 받아들이는 반응, 과정을 ‘애도’라고 한다. 모든 의식이 간소화되는 시대에도 상실을 경험한 이들이 스스로 ‘다 됐다’고 할 때까지,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그리고 충분히, 의 기준은 당사자의 몫으로 돌려줘야 한다.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상실에 대한 감정의 넓이, 그 깊이들에 대해 우리는 너그러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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