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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Dec 03. 2021

사력



수수한 색의 잠옷을 입은 친구가 느지막이 일어나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쏘아붙인다.



“왜 이렇게 늦잠을 자. 하긴, 너는 참 마음이 편할 거야.”



남자는 특별히 ‘하긴’을 힘주어 말한다. 친구는 그의 날 선 말투에 어리둥절하다. 남자는 몇 달째 친구네 집에서 무전취식 중인데 언제쯤 지낼 곳을 구해 나갈지 알 수가 없다. 친구는 남자가 아마도 거취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오늘 조금 예민한가 보다, 하고 생각한다. 맞다. 남자는 답답했다. 겨울이 다가오는데, 여전히 받아주는 곳이 없다. 아마도 이 지역에서는 어려울 것 같은데,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는 여력이 없다. 갑자기 올라오는 짜증을 풀 곳은 그래도 함께 지낸 친구뿐이라서 오늘 할 말은 해야겠다.



“내가 꼭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건 아니야. 처음엔 그냥 너 보러 들렀던 건데 그대로 눌러앉게 된 거지. 처음에 너도 흔쾌히 승낙했잖아? 그런데 너는 나를 은근히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야. 기분이 아주 나쁘다는 거지. 너희 부모님, 동생, 형, 사촌, 사돈에 팔촌까지 나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느낌이야. 그리고 네 엄마, 아빠가 얼마나 나에게 쌀쌀맞게 구시는지 알고 있어? 대놓고 말하시더라. 너는 왜 그렇게 뻔뻔하녜. 눈치도 없이 밥도 많이 먹냐고. 그래도 난 꾹 참았다. 여기가 나에게 최선인걸 아니까. 사력을 다해서 네 수많은 가족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사랑과 보살핌만 받고 크는 너는 모를 거야. 환영받지 못하는 자리에서도 삶의 이유를 찾아야 하는 가혹함 따위, 너는 느껴보지 못했을 거야.”



남자는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친구는 미안했다. 부모님이 남자를 지독히 싫어하신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첫날 재워주지 말았어야지, 네 방인데 저 녀석이 방을 더 넓게 쓰고 있지 않냐고. 너는 왜 주인처럼 굴지를 못하냐고. 그래도 친구는 남자에게 매몰차게 할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래전에 그가 나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미안해.”



얘가 또 착한 척이네. 친구의 사과에 남자는 더 나쁜 놈이 되는 기분이다. 항상 묵묵히 듣기만 하는 친구에게 할 말이 아닌데, 감정이 앞서니까 주체가 안되었다. 억울하면 성공하랬는데, 친구한테 이럴 게 아니라, 살아남아서 이 겨울을 나면 꼭 떠나야지. 반드시 성공해야지.



“됐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옷 좀 더 챙겨 입어. 날씨가 춥다.”


“그러게 추워지네. 그런데 너는 왜 민소매 차림이야. 여름도 아닌데, 아직 팔팔한가 봐.”






서리가 내린 누런 잔디 사이에 암덩이처럼 퍼져있는 토끼풀을 보면서 여자가 말한다.



“여보, 이번 주말에는 토끼풀에 농약을 좀 쳐야겠어.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얘는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네. 그냥 두면 내년에는 더 퍼질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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