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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달 Sep 29. 2020

(스포) 도망친 여자, 일종의 의지 - 홍상수

도망친 여자는 텃밭에 있는 서영화가 어떤 젊은 여자와 대화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대화에서 '아침에 보니까 좋네요.'라는 부분이 나온다. 홍상수에게 낮과 밤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영화 밤과 낮에서도 나왔듯 낮에는 낯선 사람, 의외의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를 쌓는다면 밤에는 꼭 보고 싶은 내밀한 이와 통화하는 시간이다. 후에 알고 보니 젊은 사람은 어머니가 자신과 아버지를 두고 도망쳤다. 여기서 나온 무명의 도망친 여자이며 젊은 여자와 아버지는 남겨진 사람들이다. 젊은 여자는 어머니의 부재에 대한 상처 때문인지 밤이면 종종 밖에서 담배를 피운다. 서영화는 그러한 '밤'에 함께 나와 담배를 피운다. 첫 시작이 주로 밤에만 봤던 서영화와 젊은 여자가 아침에 만나는 걸로 시작한 건 슬픔을 딛고 새로 시작해보자는 일종의 의지가 느껴진다.


그러한 의지는 김민희의 출연으로 이어진다. 김민희는 수년 동안의 결혼생활 동안 남편과 떨어져 지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한 그녀가 남편의 출장(조금 의심스러운)때문에 알고 있던 사람들을 만난다. 첫 번째는 서영화. 남편과 이혼 후 여성 룸메이트와 살고 있는 사람이다. 김민희와 대척점에 있는(남편과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 김민희와) 여성이다. 김민희는 자신이 서영화를 좋아하지만 남편이 좋아하는 사람이라 찾아왔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김민희의 현재 상황과 반대편에 있는 서영화를 남편이 좋아한다는 말은 이렇게 느껴지기도 한다. 네가 지금 생활에 불만을 느끼거나 혹 다른 생활을 느껴보고 싶으면 서영화를 통해 대리 만족하라. 혹은 그것도 부질없다는 것을 한번 봐라는 식으로 말이다.   


서영화와 룸메이트, 김민희는 고기를 구워 먹고 사과를 먹는다. 한 이웃 남자가 문을 두드린다. 서영화네 집에서 고양이 밥을 주고 있기 때문에 도둑고양이가 공동주택 마당을 활보한다. 그래서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자신의 부인이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고 이야기한다. 그래도 고양이라고, 고양이보다 이웃이 더 중요하지 않냐고 말한다. 서영화의 룸메이트는 사람도, 고양이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홍상수가 늘 그리려 한 결론짓지 않는 세상, 모든 것을 열어두고 바라보는 삶에 대한 이야기로 느껴졌다. 저울질하지 않고 아내가 무서워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양이가 먹고사는 것도 중요한 세상. 그 세상을 씩 웃으며 바라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은 송선미이다. 송선미는 주변의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집주인(남자로 보인다.)은 예술을 좋아해 창작무용을 (취미 수준으로) 하는 송선미에게 전셋값을 1억 정도 깎아준다. '예술'을 하는 사람을 지원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한다. 그의 집 근처에는 '예술'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술집이 있는데 그곳에서 위층에 사는 남자를 만난다. 위층에 사는 남자는 아내와 별거하는 사람인데 송선미와 좋은 관계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송선미와 김민희의 대화에서 '너무 많이 참아왔어. 이제 재미있게 살 거야.'라고 말하며 송선미는 그 재미에 대해 생각이 많아 보인다. 한 시인이 송선미를 찾아와 책임지라. 수치를 줬다고 말하며 안에 들어가 이야기하길 요구하지만 송선미는 단번에 거절한다. 이때 송선미는 참지 않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한번 잤던 관계인데 20대 중반 정도 나이였던 시인에게 그 경험은 너무나 강렬했는지 계속 송선미의 주위를 맴돈다. 송선미는 실수로 잤다고 한다. 실수, 우리는 간밤에 실수를 하고 아침에 후회를 한다. 후회를 하고 실수를 하기도 한다. 그것은 거스를 수가 없는 실타래처럼 이어진다. 어떨 때엔 화를 낼 때도 있고 소리 내어 웃을 때도 있다. 송선미는 여기서 소리 지르고 웃고 밥을 먹고 그런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실수로 불러야 할까. 하룻밤을 허락한 것? 시인에게 소리 지른 것? 그 집에 들어온 것? 실수는 그 후에 결론이 나며 우리는 끝까지 가봐야 실수의 정체를 알 수 있다. 영화 예술은 기승전결이 있다. 마치 하나의 삶, 하나의 세계를 통찰할 수 있게 하며 어떤 선택이 실수였는지 무엇이었는지 파악하게 해 준다. 그 총체적인 세계, 홍상수의 영화는 그 총체성을 하나하나 쪼개 낸다. 긴가민가 고개를 젓게 만드는 영화, 그건 우리 생활의 한 부분 같지만 그것보다 훨씬 깨끗하고 명징한 생활의 발견이다.


김민희가 마지막으로 만난 상대는 김새벽이다. 영화를 보러 왔는지, 커피를 마시러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아마 근처에서 송선미를 마시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 온 듯 보인다. 에무 시네마 1층 카페에서 숲을 배경으로 커피를 마시던 중 김새벽을 만난다. 김새벽과 김민희는 꽤나 어색한 사이로 보이는데(아마 남자, 권해효 때문으로 보인다.) 김민희가 미안하다고 말한다.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갑작스러운 만남과 고백, 그리고 김새벽은 김민희에게 영화를 보여준다. 영화를 다 본 후 새벽의 남편, 민희의 전 남자 친구였던 권해효에 대해 말한다. 말이 많아졌다고... 김새벽은 말을 하다 보면 계속 똑같은 말을 반복할 때가 많은데 과연 그게 진심이겠냐고, 반복할 때마다 똑같은 정도의 진심을 담을 수 있겠냐고 이야기한다. 김민희는 권해효를 만나 또 말에 대해 이야기한다. 너무 많이 말하지 말라고. 다 날아가 버릴 거라고(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한다. 꽤나 성공한 작가로 보이는 권해효는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말을 선택한다. 많이 공부하고 재능도 있기 때문에 말을 잘할 것이며 사람들은 그 말에 반응한다. 과연 말이 생각을 담는 그릇으로 정확한 걸까. 그러나 그 말이 없다면 우리는 각자의 생각을 나눌 방법은 전무하다. 그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는 게 어떤 의미일까. 말을 멈추라. 생각을 좀 더 갈고닦아라. 타인에게 생각을 보여줄 생각을 하며 쓰는 에너지 대신 생각에 대해 더욱 생각하라는 걸까. 홍상수의 영화에서 실없는 '말'이 주는 힘을 생각할 때 젠체하며 쓰는 말 대신에 별 의미 없는, 그냥 하나의 웃음으로 끝나는 말에 손을 들어주는 게 아닐까.


이번 홍상수 영화는 9월 28일 낮 12시 10분, 서울극장에서 봤다. 탄산음료를 텀블러에 담으면 천 원에 먹을 수 있다고 해 콜라를 샀다. 작은 포스터도 받았다.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에서 도망친 여자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으나 결국 여기서 나오는 모든 여성이 어딘가로 도망치고 있다. 그러한 의지를 영화에서 보았고 그게 좋은 방향인지 어떤지 판단하지 않는 게 보다 건강한 태도라고 말하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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