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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 May 25. 2018

다시 런던에 가고 싶은 이유

런던에서의 마지막 날


손으로 건네는

작별 인사



영국에서 맞는 첫 일요일이자 런던에서 보내는 마지막 하루. 다섯 개의 도시 중 하나를 마무리할 시간이 왔다. 행복한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우리는 늘 바라지만, 끝과 마주해야만 소중함을 깨닫는 것들도 있는 법이다. 오래된 숙소도, 삐걱대는 복도의 나무 바닥도, 시크한 두 마리의 고양이도, 조용한 부엌에서 맞는 평온한 아침 시간도 마지막 날이 되니 새삼스레 아름다웠다. 집주인 해티 Hattie와 조쉬 Josh는 약속이 있어 외박을 하게 되었다며 토요일 아침부터 서둘러 나간 터였다. 토요일도 늦잠을 자는 바람에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이대로 떠나기는 싫어 일어나자마자 짧게 카드를 남겼다.



아침 식사를 거나하게 먹고 그 자리에서 카드를 썼다. 지금 다시 보아도 훌륭한 조쉬네 주방.


직접 쓰는 카드는 왠지 낯설기만 했다. 최대한 작은 걸로 고른다고 애를 썼는데도, 하얀 여백이 주는 중압감은 피할 수 없었다.  지울 수 없는 까만 볼펜을 들고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영원과 마주 앉아 고마웠던 것들과 좋았던 것들을 함께 떠올렸다. 입을 일(一) 자로 앙다물고, 고개를 갸웃하며 손으로 쓰는 헤어짐의 말. 이별의 포옹도, 아쉬움을 담은 눈빛도 없었지만 우리 나름의 엄숙하고 진지한 이별 의식을 치른 듯했다. 답장도 받을 수 없는 카드를 두고 집을 나서니 금세 마음이 헛헛해졌다. '런던에 다시 온다면…', '다음에 여행을 온다면…'하고 다음을 끝없이 기약하며 마음을 달랬다.    



새침하고 도도한 웬즈데이
귀여운 개냥이 몰티샤





매일과 같은

일요일



화려한 소호 거리 한 가운데 위치한 올소울즈 교회(All Souls Church)


영원과 나는 교회로 발걸음을 향했다. '주일'을 특별하게 지키는 개신교인의 습관이기도 했지만 가능한 일상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이미 쇠락한 길을 걷는 종교라지만, 오래되고 아름다운 교회 건물은 종종 눈에 띄었다. 기독교와 역사를 함께한 나라의 풍경이었다. 종교전쟁으로 얼룩진 영국 왕권의 역사, 종교개혁의 선봉에 있었던 웨스트민스터,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까지. 개신교의 굵직한 역사적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라 생각하니 의미가 남달랐다. 동네의 작은 교회를 들를까 하다, 좋아했던 기독교 저자 존 스토트 John Stott목사가 시무했던 올소울즈 교회 All Souls Church를 방문해보기로 했다. 전 세계에 잘 나간다는 패션 브랜드는 모두 모아 놓은 듯한 런던의 소호 한가운데 교회가 떡하니 놓여 있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올소울즈 교회 내부의 모습. 전광판 바로 옆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마친 후엔 별도의 모임을 가지려는지 청년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슬쩍 같이 앉아 영국의 젊은 크리스천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면 좋겠다 싶었지만, 다가오는 기차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남은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아쉽지 않게 보내야 했다.


교회 앞으로 펼쳐진 리젠트 스트릿과 옥스퍼드 스트릿. 그동안 다녔던 런던 어느 곳보다 패션피플이 많은 거리였다.




기차로 떠나길

잘했다



마지막이라지만 그리 특별하진 않았다. 평소처럼 되지도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렸고, 간간히 짧은 소회를 나누기도 했다. 다리가 아프도록 런던 시내를 걷고 또 걸었다. 소호의 거리를 지나 호그와트로 갈 수 있다는 킹스크로스 역 King's Cross Station의 9와 3/4 승강장을 마지막으로 들렀다. 호그와트 입학생들 마냥 기념촬영을 하는 관광객들을 뒤로 하고 패딩턴역 Paddington Station으로 향했다. 토트네스 Totnes로 가는 기차를 타야 했다.


걷고 또 걷다 지쳐서 누구 집인지도 모를 건물 앞에 잠깐 앉아 쉬는 중



별 기대 없이 들른 런던이었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우니 잠깐 머물자는 마음이었다. 어떤 사람은 런던은 우울하다 했고, 또 다른 사람은 프랑스나 스페인의 화사함에 비교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내가 머문 시간은 고작 사흘. 스치듯 흘러가버린 시간으로는 이 거대한 도시의 묘미를 다 설명할 수도, 다 알 수도 없었다. 하지만 런던에 대한 몇 가지의 기억은 남았다. 아름다운 빈티지의 도시라는 것, 조쉬와 해티와 같은 따듯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 웬즈데이처럼 귀여운 고양이들이 안심하고 산책하는 도시라는 것, 감히 상상도 못 한 화려하고 독특한 패션이 가득하다는 것, 거리에서 마시는 맥주만큼 흥겨운 곳이라는 것, 무엇보다 가보고 싶은 곳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는 것. 런던에 대한 모든 기억이 런던을 다시 와야만 하는 이유가 되었다.


기차를 놓칠까 한바탕 달리기를 했다. 자리에 앉아, 한 숨을 돌리니 플랫폼을 서서히 벗어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런던 한복판의 시끌벅적함과 화려한 건물들이 서서히 멀어지며, 점차 고요해지고 낮아지고 푸르러졌다. 영화의 엔딩처럼 흐려지는 도시의 풍경. 나는 이 헤어짐이 좋았다. 아쉬움이 잔뜩 남는 끝에 어울리는 이별 같았다. 채 떨구지 못한 미련 덕에 거듭 되뇌는 재회의 약속. 그 위로 새롭게 만나게 될 토트네스에 대한 설렘이 묘하게 겹쳐졌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디졸브의 시간이었다.



첫번째 집에서 찍은 사진. 우리의 인생 사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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