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에도 엘지트윈스 팬으로 살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가 떠오르는 밤이었다.
경기를 보는 내내 그가 생각났다.
2014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엘지트윈스 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LG팬이란 얘기를 듣고, 이 분도 쉽지 않은 야구팬 인생을 살아오셨겠구나 싶어서 장난을 섞어 위로하기도 했었다.
난 야구를 좋아했지만 특정 팀을 응원하지는 않았었기에 그와 연애하고 결혼까지 하며 자연스럽게 엘지트윈스 팬이 되었다.
그와 함께 사는 동안 우리는 저녁이면 늘 야구를 봤다. 주말 경기가 잠실에 있을 땐 경기장을 찾았다. 매 년 야구를 보러 갔고, 현장에서 함께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이동현 선수의 은퇴식 경기는 현장에서 직관하며 마지막 투구를 지켜봤다. 그때 내 옆에서 눈물을 흘린 그의 얼굴이 생각난다.
한 번 빠지면 깊게 빠지는 오타쿠의 기질 덕분에, 금세 나는 "무적 LG 승리를 위해"라는 구호가 입버릇처럼 나오는 팬이 되었다.
그와 이혼한 다음 해에는 야구를 보지 않았다.
뉴스로 엘지트윈스의 소식을 계속 보긴 했지만, 그때의 나는 그저 혼자의 삶을 버텨내는 게 가장 중요했으니까. 엘지 야구의 시작은 그와 함께였기에, 더욱 야구를 보지 못했다. 왠지 그가 생각날 것 같아서였다.
올해 나에게 다시 야구가 찾아왔다.
어느 해보다 엘지트윈스는 강했고, 굳건했고, 선수 한 명 한 명이 기특했다. 설마 설마 하던 정규시즌 우승을 할 때까지도, 한국시리즈 우승할 때까지는 설레발치지 말아야지 하며 말을 아꼈다. 쥐레발은 금물이니까.
그리고 2023년 11월 13일.
내가 9년을 기다리고, 그는 29년을 기다렸을 엘지트윈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이 신민재 선수의 마지막 송구로 확정되었다.
이 순간이 오면 환호성을 지르거나 방방 뛰지 않을까 했는데, 막상 선수들이 잔디로 뛰어나오는 장면을 봐도 감정이 격해지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조용히 웃으며.
그러다 오지환 선수가 화면에 잡혔는데 눈시울을 붉히며 울고 있었다. 그제야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오지환을 보자 박용택 선수도 생각났고 이동현 선수도 생각났다. 2014년부터 쭉 지켜본 엘지 팬으로서 결국 우승반지를 끼지 못한 채 은퇴한 선수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내가 엘지트윈스를 응원하며 얼마나 행복했는지도 생각났다.
가을야구를 못하는 해도 있었고, 프로 선수인데 왜 저거밖에 못하냐며 속으로 심한 말도 했다. 엘린이들은 어릴 때부터 절망을 함께 배운다며 그와 농담도 했었다.
그렇지만 다시 야구시즌이 돌아오면 행복했다. 2군에서 주목받지 못하며 시작했어도 꾸준히 노력해서 한국시리즈 선발 라인업을 당당히 차지한 선수를 보며 흐뭇했고, 큰 실책을 했어도 다시 절치부심해서 멋진 수비수로 자리매김한 선수를 보면 응원하고 싶었다.
어제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선수들을 보고 있으니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들 때문에 화냈던 순간, 허탈했던 순간, 감동스러웠던 순간, 울컥했던 순간들이 모두 선명했다. 다양한 감정과 기쁨을 야구를 응원하며 느꼈고, 그 시간은 내게 보물 같은 순간들이었다.
엘지트윈스의 팬이라서 행복한 밤이었다.
그리고 나를 엘지트윈스 팬으로 이끌어준 그에게도 고마운 밤이었다.
아마 나보다 더 어제를 기다렸을 그가 생각난다. 그에게도 더 큰 축하를 보낸다.
*[우리 종착지가 사랑이 아니라면] 수요일 업데이트
*[에리카 나랑 브런치 먹으러 뉴욕갈래] 토요일 업데이트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