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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Mar 16. 2024

무빙, 서글픈 한국판 엑스맨

영웅에서 일반인으로의 애처로운 승진시험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무빙을 정주행 했다.


한 박자는커녕 세 박자는 늦은 시청이었다. 강풀의 원작답게, 내로라하는 출연진들의 연기 덕에 이야기에 흡입되어 버렸다. 덕분에, 에피소드 한 개당 1시간가량의 분량임에도 주말새 후루룩 즐길 수 있었다.


한 줄 평은 한국판 엑스맨. 가족주의가 바탕이 되는 것도, 남북간 갈등과 그 구조 속 주인공이 희생당하는 서사의 익숙함이 괜히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영웅조차 그 자체로 인정받기보다는 사회 속 그 쓰임의 당위성을 인정받아야 존엄이 생기는 존재구나 싶어서다. 사람이던, 영웅이던 생물은 숨 쉬는 그 자체로 존재의 이유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증명할 필요가 있어서도 안되고, 필요도 없다.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는 사회는 서글프다. 우리나라의 영웅들은 서글프다.


어벤저스는 어떠한가. 물론 그들도 타노스라는 악에 대적한다. 다만, 그 전투의 과정에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함은 없다. 서로가 가진 초능력을 이해하고 협력하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갑자기 생긴 자신의 초능력으로 당황하고 이를 연마하는 모습은 있지만, 누군가에게 초능력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한 시련의 시간은 거의 없거나 서사의 메인 재료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거다.


작년, 회사에서 승진 면접을 봤다. 지금은 익숙한데, 처음에는 좀처럼 입에 붙지가 않았다.


'승진을 하려고 면접을 봐야 한다고?'


승진을 하기 위해 자격증이나 고과 조건을 맞추고, 시험을 봐야 한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면접을 봐야 한다니.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동료들에게 요령을 물어보니, 중요한 포인트를 말해주었다.


"무엇을 할 것인지가 아니라, 한 것을 이야기해야 해요. 지원하는 직급의 역량을 이미 수행하고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거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지만, 조금 고민해 보니 그럴 만도 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 아닌가.


흔히들 이야기하는 준비된 인재를 그 자리에 올리고 싶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입증해야 하고, 이를 자신이 이미 이룬 성과 소개로 하라는 것이었다.


불편했지만, 적응했고 주어진 면접에 성실히 임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지만, 일련의 과정이 나의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감과 묘한 불편감이 일렁이는 시간이었다.


그래, 무빙을 보며 내가 느낀 찝찝한 마음의  근원이 승진 면접이었나 보다. 에피소드마다 영웅들이 성장하고, 시험받고, 좌절하고, 긴장하는 장면들이, 마치 일반인 사회로 승진하려는 모습들로 보여서, 그래서 보는 내내 측은했나.


처절하게 피를,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는 그들의 역경 순간에 내 손가락은 바쁘게 건너뛰기 버튼을 누다. 아픔의 순간이 빠르게 끝나고 평안이 찾아온,  초능력은 필요 없는 그들의 시간에서 내 위안을 빠르게 찾고 싶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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