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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카 May 15. 2023

투병기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것은 나의 투병기이다. ‘투병기’ 정도의 이름을 붙이려면 몸의 일부가 사라진다거나 이름부터 무서운 불치병 정도는 겪었어야 할 듯하다만, 그 기준은 상대적일 테니 그저 나의 경험에 거창한 이름을 붙여 본다. 떡볶이를 먹고 싶다고 용감하게 외친 책을 필두로 요즘의 인식이 많이 부드러워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정신건강의학과에 간다는 것은 장염으로 내과를 방문하는 것보다는 장벽이 높은 것 같다. 나도 내 발로 찾아가기까지 수개월, 수백 시간의 고민이 있었다.


처음 내 발로 병원에 찾아간 것은 2018년 말이다. 그 당시에는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서 병원을 찾았고, 그 이후로 병원을 네 차례 바꿨다. 잘 맞는 의사를 만나는 건 천생연분 배우자를 찾기 만큼 어렵다고 했던가. 첫 병원은 원래 가고자 했던 병원의 예약이 너무 어려워서 급하게 대체로 방문한, 동네에서 당일 진료가 가능한 병원이었다. 그곳은 창문도 없이 어두컴컴했고 사람도 없었다. 마침 내가 방문할 당시 유일하게 있던 어느 중년의 여자 환자는 원장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있었다. 난 속으로 ‘얼마나 마음이 아프면 저렇게 화를 낼까?’ 싶었다. 그 병원의 원장은 이미 은퇴했는데 불법 진료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노인이었는데 첫날부터 약을 한 다발 처방해 주었다. 첫 병원은 나도 뭐가 뭔지 몰라 주는 대로 약을 받아먹었고 그마저 몇 주 지나지 않아 원장에게 약에 대한 질문을 했다가 호통을 들었다. 얼마 후 나도 첫날 보았던 여성 환자처럼 원장과 마치 가족오락관의 이구동성 게임을 하듯 서로 고성을 주고받았고 발길을 끊었다.


이후의 병원을 구구절절 다 이야기하긴 어렵고 단순히 요약하자면 전형적인 ‘한국인 의사들’의 집합체였달까. 어딘가는 사람이랑 상담을 하는 건지 AI랑 상담하는 건지 헷갈렸고 어딘가는 진료가 1분도 안 걸리는 약 제조 공장을 방불케 했다. 차도가 크게 없어 답답한 나머지 개중 제일 양호했던 마지막 병원에서는 종합 심리검사도 받았다. 아이큐 검사부터 그림그리기, 단어 맞추기, 문장 검사 등등, 검사비가 40만 원대였나? 너무 비싸다고 속으로 투덜댔었는데 검사를 자그마치 6시간 정도 하고 난 뒤에는 합당한 가격이구나 고개를 주억거렸더랬다. 그 와중에 이 나이에 아이큐가 좀 높게 나왔다는 것에 철없이 내심 기뻐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종합 심리검사 또한 크게 도움을 주진 못했다.


병원에 대한 내 생각은 어디를 가든 딱히 기대를 크게 갖지는 말자는 것이다. 제일 힘든 부분, 예를 들어 불면증이나 공황장애 같은 주요 증상이 완화된다면 병원과 약의 역할은 그것으로 충분한 것 같다. 단지 내 경우에는 약 덕분인지 잠은 그나마 잘 수 있었지만, 이놈의 약을 언제까지 먹어야만 하나 싶은 생각에 더 우울해질 것만 같았다. 소화불량 같은 소소한 부작용이 계속 따랐고 몸의 컨디션이 점점 떨어져서 결국 약을 끊기로 했다. 그 당시에는 무리하게 단약을 시도하고 후폭풍을 맞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몰랐기에 무식하게 약을 끊었고 한동안은 더 힘들어했다. 이후 증상 완화를 위해서 매일 30분 이상 걷기, 땀 흐르도록 운동하기, 햇빛보기, 명상, 커피 끊기, 보조제 먹기 등등. 나름 혼자 소소한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거의 다 해봤고 그 중 어느 정도는 내 패턴으로 만들었다. 물론 신앙의 힘도 빌어 보았고 교회 사역자님들과의 상담은 물론이요, 홍대에서 과천까지 매주 전문 상담사와 상담도 하러 다녔다. 효과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정도였다.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는 것 외에 살아남기 위해 시도 해 본 것 중 특이하다 할 만한 것 중 첫 번째는 다이빙이다. 2019년 1월에 시작해서 방학 때마다 동남아에서 한두 달씩 살다시피 했고 겨울에는 무조건 따듯한 나라로 도망가서 그동안 받지 못한 햇빛을 과도하게 받아 인종이 바뀌어서 오곤 했다. 맨몸으로 하는 프리다이빙으로 시작했다가 숨을 참는 고통과 다이빙 전날 음주를 금하는 분위기에 스쿠버다이빙으로 방향을 틀었고 바다에서 다이빙하는 건지 술통에서 다이빙하는 건지 모를 만큼 흠뻑 취해있었다. (참고로 음주는 정신건강에 안 좋다.) 가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우주에 둥둥 떠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은. 내 호흡소리에 집중하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한참 재미를 들여 해외를 다니다가 코로나가 터져서 국내로 눈을 돌렸는데 웬걸, 한국 바다는 동남아처럼 산호가 예쁘지도, 물이 따듯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해외길이 막힌 이후에 발을 돌린 세계는 서핑이었다. 그런데 웬만한 운동은 다 좋아한다고 자부했거늘 균형감각이 없다는 것을 몰랐다. 겨우 보드 위에 서더라도 갓 태어난 기린처럼 바들바들 떨었지만, 그냥 바다가 좋고 물에 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1년 이상 강원도를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서핑한다기보단 단골 샵 레트리버 강아지의 똥 셔틀을 하러 간다고 하는 게 더 맞긴 하지만 장거리 운전을 하면서 오디오북이나 음악을 듣는 것, 풍경을 보는 것은 나름 도움이 되었다. 그러다 증상이 안 좋을 때 긴 터널이라도 들어가면 어디 벽에 그냥 차를 박아버릴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도 모르게, 고민 없이 고통 없이 끝나면 참 좋겠다 싶은…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몇 킬로미터에 달하는 긴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그전에는 인지하지 못했었는데 터널 안에는 짧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수많은 비상구가 있었다. 위급상황에서 터널에 갇히기라도 하면 탈출할 수 있는 그런 비상구. 또 그 비상구를 못 볼세라 현란한 조명들도 도움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음이 아플 때는 경주마같이 시야가 좁아지다 못해 빨대 구멍으로 세상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시야가 좁아지면 도움을 주려는 손길을 보지 못한다. 그 도움의 손길은 누군가가 내민 걸 수도 있고 나 스스로 내민 걸 수도 있다.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으면 남의 손길 기다리다 터널에 갇히지 말고 스스로 오함마라도 들고 비상구를 깨부수자. 세상 밖으로 나가자. 물론 침대 밖으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큰 결심이 필요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내가 나를 돕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결론이다.


지금도 때때로 아직 빨대 속에 갇힌 것 같기도 하지만, 눈구멍을 조금씩 조금씩 넓히려고 노력 중이다. 지금 힘들어하는 그대도, 나도 이제는 빨대 구멍이 아닌 가자미 같은 넓은 시야로 그보다 더 넓은 바다를 바라볼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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