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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카 May 02. 2024

출생의 비밀

비교는 금물

‘어휴, 지 오빠는 착한데 저건 못돼갖고…!’

어릴 때 엄마한테 자주 들은 말이자 기억에 각인된 멘트다. 엄마는 자주 오빠랑 날 비교하며 인상을 쓰곤 했다. 엄마에게 오빠는 착한 아들이자 착한 아이, 난 이기적인 못된 애.

국민학생이던 시절, 양재동 부잣집 양옥 2층에 세 들어 살던 시기에, 엄마는 날 무릎 꿇고 앉으라고 하더니 너무 힘들어서 널 못 키우겠다며 기숙학교로 보내던가 내보내겠다고 선언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쫓겨날 정도로 그렇게 큰 잘못을 했던가? 아니, 난 그저 남들보다 사춘기가 조금 빨리 온 정도였다. 물론 기억은 주관적인 것이지만 말이다. 그때 살림살이가 워낙 힘들었고 엄마의 갱년기가 겹쳐서 그랬나 싶었지만, 낳아준 엄마한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어린 시절의 충격은 평생을 따라다닌 상처가 되었다.


굳이 비교해 보자면, 오빠는 정말 착하다. 어릴 때는 치고받고 싸우기도 했었지만, 기본적으로 성품이 유하고 욕심도 없다. 오빠가 고3이던 때, 어렵게 중고로 사 온 ‘시디플레이어’라는 최첨단 기기를 내가 하루 빌려서 독서실에 가져갔다가 바로 그날 도둑맞은 일이 있었다. 내 자리에 올려두고 오락실에 가서 테트리스를 딱 한 판하고 왔는데 사라진 것이다. 감시 카메라도  흔치 않던 시절이라 도둑은 당연히 못 잡았다. 평소에는 잘 가지도 않던 오락실을 그날따라 왜 갔는지 후회하며 집에 와서 펑펑 울면서 이실직고했더니, 한숨 한 번을 안 쉬고 괜찮다고 해주던 그런 착한 사람이 우리 오빠다.


그에 반해, 난 어릴 때부터 욕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없이 자라서인지 과자를 손에 쥐면 잘 안 뺏겼다고 하고 공부라도 잘해야 칭찬을 받을 수 있어서 그랬는지, 공부 욕심도 많아서였는지, 시키지 않아도 공부하곤 했다. 친척들은 오빠를 더 예뻐했다. 아들 3과 딸 7을 낳으신 할머니는 오빠만 잘 안아주셨다. 대학교를 멀리 간 오빠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아빠가 준 차를 끌고 다녔고 미국 유학도 갔는데, 난 대학 때부터 학비를 혼자 벌어서 다녔고 대학원도 학자금 대출로 다니며 생활비를 보탰으니, 내가 이 집안의 콩쥐인가 싶기도 했고 남존여비 사상인지 알 수 없는 차별을 받는 것 같았다.


우울증 진단을 받고 1년 정도 지난 뒤에야 부모님께 털어놨을 때, 아빠의 첫마디는 ‘너처럼 강한 애가 그럴 리 없다’였다. 내가 받은 차별의 기억을 토로하며 섭섭함을 쏟아 냈을 때, 모진 말들은 기억이 안 난다고 하셨지만, 차별에 대한 건 미안해하셨다. 엄마한테 못됐다는 말을 수백 번은 들은 것 같은데 그건 왜 기억 못 하시지? 진짜 못하시는 건지 미안해서 기억 안 난다고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빠는 죽기 전에 너한테 해 줄 이야기가 있다고 말을 흐리시고는, 몇 주 뒤 뜬금없이 밥 먹자고 내가 사는 동네로 오셨다. 혼자 산 지 10년이 넘었는데 이삿날에도 안 왔던 아빠가 오신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아빠는 초밥을 먹고 싶다고 했고, 프리미엄 초밥을 사드렸다. 다음으로 동네 커피숍에 가서는 마치 ‘어제는 김치찌개를 먹었다’라는 일상적인 대화를 하듯, ‘사실 네 오빠는 친오빠가 아니다’라는 폭탄 발언을 하셨다. 인터넷 밈이 되어버린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마시던 음료가 다시 입 밖으로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오히려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아빠가 장난을 치나 싶었다.


오빠의 생모께서는 오빠를 낳자마자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빠는 갓난쟁이던 오빠를 위해서 급하게 엄마랑 결혼했고 그 뒤에 내가 태어난 거다. 오빠랑 나는 이복남매였다. 이 사실만으로도 충격적인데 오빠는 물론, 집안 모든 친척은 다 알고 있고 나만 평생 모르고 있던 것이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는 오빠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단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엄마는 혹시라도 오빠가 차별받는다고 생각할까 봐 어린 나에게 더 야박했던 건지, 머릿속에서 생각이 엉켰다.


아빠는 본인을 더 많이 닮은 나를 사랑하지만, 친엄마의 정을 모르고 자란 오빠가 짠해서 없는 형편에 차도 주고 그랬다고, 모든 상황을 아는 친척들도 오빠가 안쓰러웠을 거라고, 폭탄 발언을 마무리하고는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셨다. 마치 평생의 숙제를 해결한 듯 개운한 표정으로 웃으시던, 얄밉기까지 했던 아빠는 그렇게 가셨고 폭탄의 뒤처리는 내 차지였다.


생각을 소화하느라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오빠한테 얘기를 꺼냈다. 넌 끝까지 몰랐으면 했다며 우리가 남매인 것은 변함이 없다고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에 목 언저리가 뜨거워졌다. 그래, 피가 좀 다르다고 변한 것은 없다. 장기 기증은 못 해주겠지만 우리가 가족인 것은 변함이 없다. 우린 어린 시절을 공유한 피붙이이다.


오빠는 자기는 어릴 때 자주 듣던 말이 ‘넌 왜 그렇게 물렀냐, 욕심도 없냐, 하고 싶은 것도 없냐?’ 였다고 웃었다. 물러 터진 아들에게는 넌 참 착하고 순해서 좋다고, 욕심 많은 딸에게는 넌 참 열정이 많고 뭐든 알아서 잘 해내서 좋다고, 그 차이를 칭찬과 따듯한 표현으로 보듬어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지울 수가 없다만…


내가 주워 온 자식인가 오해할 정도로 친아들이 아닌 오빠를 더 챙기던 엄마가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동안 아무것도 모른 채 차별당했다고만 생각한 스스로 우스웠다. 오빠는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고등학생 때였다는데, 혼자 삭혀야 했을 오빠가 안쓰러웠고 나를 배려한다고 알리지 않은 가족들에게 섭섭하면서도 고맙기도 한, 복잡 미묘한 감정이 뒤섞였다.


‘그동안 차별받는다는 오해에 엄마의 노고도, 오빠의 아픔도 몰랐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구나.’

‘그동안 왜 나만 힘들다는 착각에 빠져 고통을 초래했을까.’


오빠는 고등학생 때 이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 낸, 힘들게 구한 ‘시디플레이어’를 하루 만에 도둑맞은 이복동생에게 화 한번 안 낸 착한 사람이다.


몰랐던 출생의 비밀이 나도 조금은 더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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