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오줌싸개의 고백
작년 가을, 사이판에 다녀왔다. 4박 6일, 내가 갔던 여행 중 가장 짧은 기간이었다. 학기 중이니 어쩔 수 없었지만 돌아올 때 어찌나 아쉽던지… 오랜만에 다이빙만을 위한 여행이자, 8명의 크루들과 같이 간,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간 다이빙 투어였다. 이전에는 한번 해외에 나가면 한 달씩 동남아에서 살다시피 했던지라, 그 시간을 다 맞출 수 있는 동행을 구할 수도 없어서 늘 혼자 여행을 다녔다. 물론 현지에서 만난 동행들과 새로운 인연을 쌓는 것도 좋은 경험이고 재미있었지만 한국에서부터 출발과 도착을 함께하다니,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이 나에게는 더 색다른 경험이었다.
서핑한다고 돌아다니기만 했지, 실력도 안 늘고 물고문만 당한다고 투덜거리다가 따듯한 사이판 바닷속을 탐험하니 어찌나 신이 나던지. 게다가 멤버들의 조합도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누구 하나 모난 사람이 없고 (있다면 그건 나…) 배려의 아이콘들만 모여서 몸과 마음이 편안했다. 그중 여자는 같이 방을 쓰게 된 동생이랑 나, 둘 뿐이었는데 나보다 다이빙 경력도 많고 배려도 넘치는 룸메이트의 덕분에 일정 내내 편안했다.
다이빙 도중 딱 한 번 사고 아닌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리드해 주는 현지 가이드가 나를 버리고 가서 바닷속에서 미아가 될 뻔해서 패닉이 온 것이다. 수심이 깊은 곳에서 갑자기 수면으로 올라가 버리면 신체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꽤나 위험한데, 공포심에 호흡 컨트롤이 안된 나머지 몇 년 만에, 교육생 시절 이후 처음으로 수면으로 올라가 버렸다. 알고 보니 다른 다이버 한 분이 패닉이 와서 그분을 인솔하느라 먼저 가버렸다고 했다. 사정이 그랬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텐데 그 현지인은 내 탓을 하면서 사진 찍는데 정신 팔려서 놓친 거라고 망언을 해서 결국 내 뚜껑을 열리게 만들었다. 다른 분들의 기분까지 망치고 싶지는 않아서 참긴 했지만… 그때, 피가 안 통해서 보라색이 된 내 발을 룸메이트 그녀가 열심히 발 마사지를 해주는 것이 아닌가..! 남편도, 남자친구도 잘 안 해준다는 발 마사지를… 괜찮다고 그만하라고 해도 피가 통해서 혈색이 돌 때까지 열심히 마사지해 주는데 진짜 감동을 받았다. 나도 그런 배려 넘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달까.
우당탕탕 소동이 있었지만 다이빙의 매력은 그럼에도 차고 넘친다. 사이판의 바닷속은 새파란 크리스털처럼 투명하고 지형은 광대하고 거북이와 각종 생물도 가득해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물이 너무 깨끗해서 ‘시력이 시야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다이빙의 유일한 단점은 보트 위에 화장실이 없다는 것이었다…! 보통 배에는 간이 화장실이라도 있는 데다 물속에서 해결(?) 한다면 그건 은밀히, 아무도 모르게 하는 것인데…이 배에 타면 대놓고 자연 속에서 자연현상을 해결해야만 했다. 배 뒤편에 가서 조용히 사다리를 내리고 하체만 물속에 담근 체… 그럼 못 본 척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일본인 선장을 비롯해 현지인들은 배려는 고사하고 그 주변을 계속 돌아다니며 자기 일을 했다. 사다리를 붙든 채, 반쯤 몸을 담그고 있는 당사자만 죽을 맛인 것이다.
물속에서 볼일을 보는 것은 주마등처럼 과거 일을 떠오르게 했다. 과연 오줌싸개는 몇 살까지 용인이 되는 걸까? 비밀은 밝히는 순간 더 이상 비밀이 될 수 없지만, 굳이 밝혀보자면 난 초등학교 때 한번 실수를 한 적이 있다. 그것도 이부자리도 아닌 옷에…
그날은 한 여름의 더운 날이었고,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았던 상황임에도 졸라서 딱 한 달간 수영장을 다니던 중이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집에 오기 전에 화장실에 다녀왔어야 했는데, 귀차니즘이었는지 별로 안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참기로 했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시간은 생각보다 더 오래 걸렸고 버스에서 내려서 집으로 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어느 시트콤에서 등장하는 장면처럼 난 다리를 꼬아가며 겨우 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긴장이 풀린 탓일까, 현관문을 여는 순간 방광도 같이 열리고 말았다.
초등학교 몇 학년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이다. 그 뒤처리는 엄마가 해주셨다. 엄마는 이 오줌싸개에게 아무런 비난도 호통도 없이 묵묵히 치워주셨다. 난 너무 창피하고 굴욕적인 나머지 화장실에 들어가서 엉엉 울어버렸다. 엄마가 그때 날 다그치거나 혼냈다면 그 경험은 더 큰 트라우마로 남아서 내 자존감을 깎아먹었을 테지만, 이렇게 글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별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아마도 유일한 목격자이자 지원군이 엄마였기 때문이리라. 엄마는 이후에도 불평을 한다거나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으셨다.. 어릴 때 기저귀 하나하나 갈아주고 치워줬기 때문에 이질감이 없었던 걸까. 내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뒷바라지를 해주셨을까.
어버이날이 다가온다. 아직도 부모님에 대한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지 않은 이 좀생이는 명절에도 집에 가지 않는다. 친척들의 잔소리를 피해, 혹은 휴가라는 핑계로, 나랑 비슷한 처지의 독거인들과 모여서 시간을 보내고는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다. 이 마음의 짐을 어떻게, 언제 풀어야 할지… 그것이 요즘의 내 최대 고민이다.
어버이날이다. 용돈이라도 보내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