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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모닝 비엣남 Aug 24. 2021

#10. 베트남의 격리생활 - by Lee

 늦지도 이르지도 않는 시간에 눈을 뜨고 습관처럼 담배를 들고 집을 나선다. 집 밖을 나가지 못하다 보니 기상 시간이 조금씩 늦어지고 있다. 담배를 한대 물고 하늘을 본다. 간만에 보는 맑고 청명한 하늘이다. 베트남의 하늘이 이렇게 맑은 것 보니 곧 한국은 가을이 올 것 같다.  일년이 넘는 시간동안 고향땅을 밟지 못 하니 멀리서 하늘이라도 보면서 위안을 가져야 겠다.


 서구 사회는 마스크를 벗고 정상화를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는데 베트남은 최근 터진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유례 없는 사회적 격리 두기에 들어 갔다. 베트남의 대 도시들은 격리두기를 이유로 인해서 식당 커피샵 같은 모든 서비를 중단했고 음식 배달 버스나 택시 같은 대중 교통의 운행 역시 모두 중단을 하였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오길래 이러한 조취를 취하는지 알 수 없지만 상황이 정상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재택근무로 인하여 집 밖에는 슈퍼만 간 것이 거의 한달이 되어간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이 상황은 꽤나 적응이 쉽지 않다.  슈퍼를 제외한 다른 목적을 가지고 거리를 걸을 경우 경찰의 조사를 받아야한다. 창살 없는 감옥이다. 누구도 감옥이 있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감옥에 창살이 없다는 것이 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창살이 있다면 창살 핑계라도 될 수 있을건데...


과연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잘 적응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 나라 사람들은 보면 참으로 괜찮아 보이고 신기할 정도로 정부에 순응적이다.  한국과 베트남은 유교 문화권의 영향으로 인해서 비슷한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가 있는데 이번 경우를 보면서 대한민국과 베트남 사람들은 참으로 다르게 느껴진다. 


베트남 친구에게 이야기를 한다. 한국에서 이런식으로 통제를 하였다면 아마 하노이에 있는 정부관청들은 모두 불이 났을거라고... 코로나가 발생한 1년 8개월 가량의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통제가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면 과장은 있더라도 틀린 이야기는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들은 정부를 믿을 자유도, 믿지 않을 자유도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사람의 대부분은 정부를 두려워 하지는 않는다. 국민의 위에 있던 정부는 올림픽 성화와 함께 불타 버렸기 때문이다.


촛불이든, 화염병이든, 형태와 모양은 다르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은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여러가지 방법을 찾았고  우리는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안다. 설사 그게 정답이 아닐지라도... 


베트남 친구는 웃으면서 이야기를 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위기에 잘 뭉쳐, 이러니까 미국이랑 전쟁을 해서 이긴거야. 지금 베트남 사람들은 이러쿵 저러쿵 위기를 잘 극복하고 있어 " "저 수많은 저영업자들은 괜찮을까?" "저 사람들도 힘들겠지만 불만 없이 잘 지내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와중에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있어. 잘 이겨낼꺼야" 과연 그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들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과연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졌을까? 익명 뒤에 숨은 사람들이 진짜 평범한 일반인이 아닌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누군가는 정치 경제적으로 자신의 이권을 챙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이 방식이 틀린걸까? 정부와 집단이 중심이 되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그리고 그 극복 과정에서 누군가의 조금 더 큰 도움과 희생을 요구하는것이?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혹시 누군가 무엇을 얻어 가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 할 수있다면 그게 과연 나쁜일일까?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난제중 하나이다. 결국 궁극적으로 모두가 원하는 것은 이 지독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원하는 것인데...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내가 조금 희생을 할 수 있을까? 어려운 이야기다.


격리 기간이 길어지고, 경찰에서 군대로 통제하는 사람들이 바뀌면서 베트남은 더욱 더 힘들어 지고 있다. 한동안 머리를 자르지 못했더니 답답하다. 나에게 공공의 이익과 그를 위한 통제 보다는 머리를 자르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하다. 내 머리도 자르지 못하게 하는 이 상황이 답답하고 화가 난다.


이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냥 나는 머리를 자르고 싶을 뿐이다. 많은 베트남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오늘도 베트남은 슬기롭게 이 상황을 이겨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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