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굿모닝 비엣남 Jul 03. 2020

#05. 베트남의 음식 - by Lee

버번 위스키

[버번 위스키]


밤 11시, 적당한 사람들과의 적당한 식사 자리가 끝나고 나서 나는 부족한 취기를 더 채우기 위해서 밤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길거리에서 알아 들을 수 없는 일본어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수많은 소녀들을 지나 발길이 멈추는 곳으로 들어 간다. 적당히 따뜻한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메뉴를 보는 척 하고는 늘 마시던 걸 술잔에 채운다. 담배 한 가치를 안주 삼아 술잔 속의 얼음을 굴려 본다. 40도가 넘는 버번이 달콤한 것을 보니 나의 하루도 술잔 속의 얼음처럼 굴러간 모양이다. 34살 나의 삶은 어디로 대굴 대굴 굴러가고 있는가? 담배와 알 수 없는 걱정은 살이 찌지 않아 참 좋은 안주 거리이다.

한잔을 다 마셔가니 짙은 쌍꺼풀이 드리운 눈을 가진 소녀가 나에게 말을 건다. ‘이름’ ‘나이’ ‘직업’ 누군가 쓴 매뉴얼 인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식상하다. 나란 사람은 없어지고 이름과 직업만 남아 있는 걸 보니 잔 속의 술이 더 달콤해진다. 식상한 질문은 다 집어치우고 조용히 술을 먹고 싶지만 나는 그 소녀의 질문에 짧은 말로라도 답변을 해야만 하는 신성한 의무가 있다.

서툰 말로 하는 나의 답변의 그녀의 관심을 끌 것이니까. 그리고 다시 오지 않을 오늘 밤 그 소녀의 시간을 산 사람의 책임감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다. 오늘밤 나는 소녀에게 돈을 주고 소녀는 나에게 시간을 준다.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말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짧아진다. 조금 더 지나면 한 글자만 남게 될 것이고, 그 시간이 많지 않으니 빨리 한잔 더 마셔야겠다.

두잔 석잔 넉잔 마셔가니 영수증 위의 흔적들이 한 줄씩 늘어나기 시작한다. 술이 조금씩 취해가니 잔술은 병술보다 비싸다라는 고대부터 전해진 숨겨진 비밀이 머리 속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조금 더 마시고 싶다. 그래서 메뉴판을 요청한다. 메뉴를 보니 500M앞의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가격이 먼저 떠오르지만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 적당한 위스키를 한 병 주문한다. 100여불 남짓의 가격, 비싸지도 싸지도 않은 적당한 가격이다. 언제부터 술집에서 100불을 주고 술을 한 병 먹는데 적당한 가격이라는 생각이 들었을까? 나도 나이가 제법 든 모양이다. 차갑게 식힌 잔, 동그란 얼음, 그리고 술에 어울리는 적당한 음악과 이국적인 소녀의 미소, 참으로 정석적이다.

하지만 내 입에 들어간 이 술은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술에 취한 탓일까? 맞다 지금 내가 술에 취한 탓일 것이다. 술에 취하면 사람은 과거로 돌아간다. 10년전 동생이 선물해줘서 처음 마신 이 위스키, 그때 느낀 향기, 부드러움, 세상과 경험이 넓어지는 느낌, 지금은 훨씬 더 비싼 돈을 주고 그것을 마시지만 그때 느낀 그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돈이 2배면 행복도 2배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무언가 이상하다. 돈을 벌면 이런 술들을 많이 마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 내가 생각이 난다.

그때는 몰랐다, 한잔이 한 병 보다 비싼 술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한잔을 내가 평생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을….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자신의 적당한 인생에 어울리는 적당한 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내 앞에서 재떨이를 갈아주는 이 친구는 아직 적당한 술을 찾지 못했을까?. 나이에 비례해서 가능성은 줄어든다. 의미 없는 하루가 지나가는 걸 보니 나의 가능성은 술잔 속의 술처럼 조금 더 줄었을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른 것은 축복이자 저주이다. 이 친구가 아직 그 술을 찾지 못했기를 기도한다. 모든 술과 인생에는 적당한 숙성 시간이 있으니…

술기운이 오른다. 내일 하루도 나의 삶은 대굴 대굴 굴러 가야 하기에 이제 계산서에 서명을 할 시간이 된 것 같다. 얼음을 굴려서 술을 양을 늘리는 것처럼 나의 말라가는 가능성을 늘리기 위해서는 나의 하루를 굴리는 수 밖에 없다. 언제까지 굴러 다닐 수 있을까? 유리잔에 부딪히며 만들어낸 결과물들이 어떤 향을 내고 맛을 내게 될까?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술잔의 얼음은 멈춰서는 안된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을 견디기 위해서는 한잔 술이 필요하다. 누군가 나에게 더 이상 새로운 술을 부어 줄 수는 없고 밤은 항상 내 예상보다 조금 더 길기 때문이다. 물인지 술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내 안에서 흐르고 있는 적갈색 액체를 나는 술이라고 믿고 싶다.

바의 문 밖을 나가니 다시 나는 현실과 마주 한다.… 그 소녀와의 판타지, 나의 허세, 불안한 감정, 내 통장 잔고들, 이 모든 것들은 Speak Easy가 되어야 할 것 이다. 계산서의 금액이 생각나 택시가 아니라 오토바이를 불러 집으로 돌아 가며 오늘도 절약했다며 스스로 자위를 해본다. 빈 거리를 달리는 오토바이를 타니 시원한 느낌이 들어 좋다. 오토바이가 넘어지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나면 복잡한 고민들은 없어 질것인데.. 하지만 소중한 당신들의 눈이 생각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 보다 남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술에 취하면 조금 조금 이기적이 되는 것 같다. 집에 도착을 하고 집에 올라가니 허기가 진다. 텅 빈 냉장고를 보며 생각한다. 내일 점심은 무엇을 먹어야 할까? 모든 것이 고민이다, 내일도 내 삶은 대굴 대굴 굴러 갈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04. 하노이 - by Le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