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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성훈 Jan 13. 2021

결과물의 질은 의도가 결정한다.

[2011년, 21살] 


소거법으로 학회장이 되었다. 동기들이 대부분 군대에 가버리는 바람에. 남은 사람은 세미나 참석률 50%에 빛나는 동기 녀석 하나와 나. 학과 생활에는 전혀 관심 없지만 심리학, 그것도 상담심리학에 관심을 가졌던 탓에 여기까지 왔다. 교육학과에 왔지만 원래 꿈은 방송작가와 심리상담사였으니까. 


학회장이란, 1년 내내 끝나지 않는 조별과제 조장과 같다. 혹은 아무도 따를 생각 없는 부반장이나 마찬가지다. 어디 가서 자랑할 수도 없고 바쁘기만 하다. 매주 세미나를 주관해야 하는 데다가,선배님들 연락 돌리고, 마지막 4달간은 논문까지 써야 한다. 이게 21살이 할 일인가. 


명예 없음, 실리 없음, 의무 다수, 보람도 마이너스. 나도 그냥 군대로 도망칠 걸 그랬다. 선배들이 다들 “너밖에 없다”며 말리지 않았다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야 하는 자리에 올랐다. 


리더가 되는 건 귀찮은 일이다. 그것도 모르고 중학생 1학년 때는 부반장을 맡았다. 세상 중요하지 않은 안건만 골라 시간을 끄는 학급회의에 앉아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고, 전혀 관심 없지만 교실 뒤편 초록색 부직포에 붙일 ‘환경 미화’ 작업 때문에 소중한 방과후 시간을 뺏겼으며, 자습 시간이 되면 선생님 대신 떠드는 친구들 이름을 적어야 했다. 


학급 임원의 실상은 완장이 아니라 자질구레한 의사결정 전담권과 재미없는 일에 시간을 써야 하는 의무, 그리고 친구들 고자질할 권한이었다. 전부 꺼져라. 세상에 재미있는 만화책이 얼마나 많은데. 학교에 1초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귀찮은 걸 왜 ‘또’ 해야 하지? 그래, 떠밀려서다. 2년 연속 부반장이 됐을 때도 그랬다. 얼굴도 잘 모르는 같은 반 아이의 추천에 떠밀려서.


그래도 이번엔 달라야지. 선배들이 말했다. 대단한 결과물을 내는 것보다는 같이 논문 쓰며 밤샌 시간이 남을 거고, 여러 선배에게 얼굴을 비쳐서 사람이 남을 거라고. 그래, 남는 건 사람이다. 학문보다는 사람이 더 중요하지.



[2021년, 31살]


리더는 귀찮은 일을 도맡는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회사에서 리더가 되면 보상이 늘어나긴 하지만, 머리 아픔의 정도에 비하면 월급 상승분은 소박하다. 수지 타산이 안 맞는 게임이지.


그래도 언제까지고 팀원으로 남아있을 순 없다. 나이가 들면 팀장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 머지않아 그런 날이 온다는,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다. 예상치 못하게 떠밀려 부반장이 되는 일은 없어야지. 얼결에 학회장이 되어 머리 싸매는 일도.


리더의 귀찮음을 회피하는 다른 방향도 있다. 기왕이면 관심의 깊이가 남다른 분야에서 리더가 되는 거다. 특히 내향인이 사람을 편하게 대하려면 관심사 기반 대화가 특효다. 이러면 끊임없이 대화가 가능하다(물론 가까운 사람이라고 여길 때도 편하지만, 이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변수가 아니다).


그래서 관심사 기반으로 사람을 만나보았다. 독서 모임 ‘트레바리’에서는 논픽션, 감도 높은 공간, 글쓰기 중심으로, 유튜브 모임 ‘유튜브코드’에서는 스토리텔링과 기획 업무를 중심으로. 공간, 글쓰기, 스토리텔링 모임에서는 모더레이터로 활동했고, 지금도 하는 중이다. 


할 일이 많아서 언제나 귀찮지만 이번엔 나의 선택이다. 끝나고 나면 꼭 남는 게 있고, 그렇게 남은 건 나에게 의미 있는 결과가 된다. 물론 과거에도 리더 역할이 종료되면 뭔가 남는 게 있었다. 어떤 생각을 나눌까 고민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거기서 새로운 의미를 끌어내 구조화하는 작업까지 모두 마음에 들었다. 관심 분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도 커졌다.


물론 과거에도 어떤 역할을 맡고 나면 성과가 없지 않았다. 다만 그 성과가 나에게 의미 있는 방향으로 연결되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설령 연결되었다 하더라도 그건 운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고 의도하지 않은 것들에 기대어 삶을 살아갈 순 없는 노릇이다. 상담심리학회장을 맡았을 때에도 그랬다. 관심 분야를 향한 애정이 깊지 않으니 적극성이 떨어졌고, 선배들의 말에 휩쓸려 원래의 관심사에서도 멀어졌다. 


결과물의 질을 결정하는 건 의도다. 같은 결과물을 얻었어도 이걸 얻기 위한 나의 의도와 선택이 합리적이었다면 그것은 실력에 가깝다. 좋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게 만드는 실력. 반대로 예상치 못한 결과물이라면 그것은 운이다. 이때 예상치 못한 결과물과 나의 선택 사이의 관계를 해석하지 않고 넘기면, 다음에도 같은 결과물을 누릴 거라 기대하기 어렵다. 


좋아하는 책에서 보았던 말을 반복해서 새긴다.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 경험 자산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경험을 쌓는다’는 표현은 너무 관용적이라 그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경험을 하는 것만으로 경험이 ‘쌓이는’ 건 아니다. 모든 노력은 이 노력을 왜 하는지, 지금 하려는 목적에 이 노력의 방식이 맞는지 질문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그걸 바탕으로 다음 단계에 오를 수 있다.
<젊은 만화가에게 묻다>, 인터뷰와 글. 위근우, 80p.


3년 전, 처음 이 대목을 읽을 당시에 머릿속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뭐든지 어물쩍 넘겼던 나에게 “더 이상 그렇게 살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한 번의 좋은 결과가 아니라 계속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지금의 의도를 점검한다. 나는 어떤 의도로 무엇을 선택했는지. 이 선택이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주길 원하는지.


다행히도 지금은 이 구절이 당연한 말로 느껴진다. 갈피를 잡기 어려울 때면 늘 머릿속에 떠올린 덕에, 떠밀리지 않게 됐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귀찮은 리더 역할을 맡아도 자부심이 생길 만한 관심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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