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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성훈 Dec 30. 2020

수능 D-180, 공부를 포기했다.

[과거, 19살의 나]


‘비교’는 수능 출제 0순위다. 


비문학 관련 참고서에 적힌 문장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이다. 모의고사 37번쯤 풀다 보면 꼭 <A와 B를 바르게 비교한 것은?> 따위의 문제가 나오니까. 3점짜리로 출제하기에 좋은 유형이라 집중해서 봐야 한다. 더 꼼꼼히 비교해야 맞출 수 있으니까.


수능이란 놈은 자기랑 닮은 걸 좋아하네 싶어서 일기장에 옮겨 적었다. 이해되지 않는 걸 이해하려고. 각자 관심사와 재능이 다른데 왜 하나의 기준으로 비교해야 하나. 이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인다. 그 어떤 어른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이런 마음을 나눌 어른이 없어 외로웠고, 다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내가 싫어졌다. 나는 나를 좋아할 수 없다. 


도망쳤다. 참고서는 덮고 만화책을 폈다. 그렇게 고3의 마지막 6개월을 보냈다. 수능을 포기한 열아홉은 남는 게 시간이었다. 식객 전권을 다 읽었고, 비틀즈부터 유재하까지 유명하다 싶은 노래는 실컷 찾아 들었으며, <매트릭스>, <맨 프롬 어스>, <지구를 지켜라> 등등 틈만 나면 PMP로 영화를 봤다.


할 일이 잔뜩 미뤄두고 긴 휴식을 가지면 내 머릿속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때 알게 됐다. 


1단계, 우월감. 남들 다 공부할 때 노는 게 진짜 재미다. 

2단계, 합리화.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난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겠다.

3단계, 덕후화. 세상엔 이렇게 재미있고 심오한 콘텐츠가 많구나. 바깥세상 따위 꺼져라.


단계가 지날수록 사회와는 멀어진다. 아무렴 어떤가. 바깥에 없는 스승이 영화 안에 있는데. 드디어 말이 잘 통하는 친구를 만났고, 나를 꿰뚫어 보는 현자도 찾았는데.



[지금, 30살의 나]


그치. 특히 마지막 단락은 시간이 지나도 크게 다르지 않아. 반경 500m 안에서 멘토를 찾기란 어렵더라. 


나와 비슷한 사람도 어지간해선 없고. 특히 공통점이라고는 나이와 사는 동네밖에 없는 아이들 무작위로 묶어놓은 공간엔 더더욱 드물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몇 년 전부터 이런 저런 모임에 나가봤어. 멋진 어른이 모여있다는 독서모임이나, 관심있는 주제를 가지고 5~6명이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곳도.


그곳엔 나이로 유세 떠는 사람도 없고, 자기 말만 맞다며 목에 핏대 세우는 사람도 없었어. 얼마나 재미있나면, 여전히 극 내향인이고 집돌이면서 그 사람들과는 여기저기 놀러다니고 심지어는 내가 모임을 만들기도 했어. 이 사람들과 더 대화하고 싶어서.


남들과의 비교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 했지만, 비교가 무의미한 영역도 발견했어. 내가 깊게 파고드는 분야가 있으니 나눌 것도 생겼고. 


돌이켜보면 너 덕분이야. 그때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다 자양분이 되어줬거든. <매트릭스>를 세 번씩 돌려보며 혼자 감동하고, <습지 생태 보고서>를 보고 나에 대해서 쓸 데 없어 보이는 고민으로 보낸 시간이 쌓이니까 지나온 길이 비옥하더라고.


남들 다 공부할 때 즐긴 것들이 출발점이 되어서, 지금은 글을 쓰고 콘텐츠를 기획하는 일이 직업이 되기까지 했어. 


어쩌다 교육학과를 졸업했을 뿐 교육 제도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어른이라 조금 초라해진다. 그래도 네가 그 시절에 도망쳐줘서,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아서 다행이야. 스스로를 좋아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지만 어쨌든 살아남은 덕분에 힘들면 조금씩 도망치면서 방법을 찾는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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