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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민 Dec 24. 2018

S#3. “일하듯이 싸우자!”

지난 10년 동안 직장생활 하며 체득한 모든 것을 동원해야 했다.

6.

  음반을 만들던 2008년. 대학 졸업 후, 프리랜서로 여러 일을 하며 특별할 것 없는 20대 시절을 보냈다. 탁월한 재능은 없지만, 음악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흥얼거리다 보니 몇 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그저 혼자 듣고 만족할 수도 있었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들려줄 수 있을 정도로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실용음악을 전공한 친구와 같이 음반을 만들어보자 했다. ‘우리 음악을 누가 들어 줄까? 그래도 한 번 해보자!’ 싶었다. 2008년, 하던 일을 모두 접고 1년을 돈벌이 안 되는 음악만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줄 만한 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배울 것이 너무 많았다. 진짜 음반을 만들 수 있을지 막연했지만, 종종 공연도 하며 ‘기분이 좋거나 우울하거나’ 음악 들으며 1년을 보냈다. 아직 CD 사는 사람이 있었던 시절이라 우리의 엉뚱한 모습을 좋게 봐 준 음반제작사도 만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홈레코딩으로 완성된 앨범은 제작사에서 섭외한 디자이너에 의해 예쁘게 디자인된 자켓을 입고 음반으로 태어났다. 2009년, 1984년생 여자 두 명이 만든 팀명, 1984(일구팔사) 앨범명, <청춘집중–난 우리가 좀 더 청춘에 집중했으면 좋겠어>

1984 EP <청춘집중-난 우리가 좀 더 청춘에 집중했으면 좋겠어>


 앨범명은 출근길에 정했다. 음반 만들며 자주 했던 생각으로 ‘우리 조금 불안하더라도 인생에서 다시없을 청년 시절을 충분히 만끽하고 즐기자’라는 의미였다. 다만, 1년을 음악만 했더니 수중에 있던 돈을 다 썼다.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해야 했다. 학교에서 영상예술을 전공해 예전처럼 이런저런 일거리를 찾아 프리랜서로 살 수도 있었지만, 혼자 무한 책임을 짊어지는 일에 신물이 났다. 매일 같은 시간, 정해진 장소로 출근하고 싶었다. 매일매일 똑같은 사람들이랑 오늘 점심 뭐 먹을지를 고민하고 싶었다. 때마침 즐겨보던 출판사 홈페이지에서 신입사원 공채 공고를 봤고, 편집자와 마케터 두 개의 직렬 중 마케터로 지원했다. 편집자는 맞춤법을 잘 알아야 할 것 같아 어렵게 느껴졌고,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니 마케팅은 배우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음반 발매를 앞두고, 출판사 입사를 알리자 음반제작사도 축하한다고 했다. 우리 모두 음악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2009년 음반 발매를 앞두고, 파주출판도시로 출근해 홍보·마케팅이란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책 좋아하는 마음 하나뿐이었다. 좋아하는 마음 하나만 있으면 됐지 싶었다. 일하면 할수록 좋아하는 마음을 잘 지켜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자주 생각했다.


 2009년 입사 후 한 달쯤 되었을 때였다. 합정에서 파주로 가는 2200번 버스를 타고 자유로를 달리며 음반 제목으로 정했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앞으로 나에게 지난 1년과 같은 무모한 시간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나보다는 회사의 입장이 중요한 순간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그래도 그 1년을 잊지 말고 내 삶의 주인으로서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그 해 발매된 앨범은 인디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작지만 따뜻한 관심을 받았고, 좋아하는 디제이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출연해 인생에 작은 이벤트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 시간을 음악보다는 홍보·마케팅 업무를 하는 사람으로 내 직업에 보람을 느끼며 살았다. 직장생활이 무료할 때마다 20대 시절 내가 만든 노래들을 들으며 위안받기도 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흘렀고, 몇 번의 이직이 있었으며, 현재도 나는 홍보·마케팅 관련 일을 하며 직장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1984 <한동안 멍하니> @사운드홀릭


7.     

 소송을 결심하기 전 대기업을 만났을 때, 나는 이런 내 상황을 정확하게 전했다. “다른 뮤지션들은 저처럼 권리 주장하기가 쉽지 않아요. 작업만 하는 사람들은 소송하느라 지치느니 포기하고 말아요. 그래서 저 지금 상당한 책임감 느껴요.” 내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여전히 판례가 없으므로 ‘저작권 침해를 인정하며’ 합의할 수는 없다고 했다. 저작권 침해를 인정할 수는 없으나 원만한 합의를 위해 합의금을 제시했다. 얼마를 받아야 할지 몰랐고, 주변에서는 대기업이니까 돈 많이 달라고 그러라는 의견을 보탰다.


 그런데 ‘저작권 침해가 아니라면서 왜 나한테 돈을 주지?’라는 의문이 지워지지 않았다. 저작권법을 보면 ‘제10조 저작권은 저작물을 창작한 때부터 발생하며 어떠한 절차나 형식의 이행을 필요로 하지 아니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왜 저작권 침해가 아닌지 납득할 수 없었다. 법에는 그렇게 쓰였지만, 현실에서는 어떤 기준 이상의 절차를 밟아야만 ‘저작물’로 인정되는 구조였다. 아니, 어떤 기준 이상의 절차를 밟더라도 어문저작물은 그 기준이 모호했다. 저작권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재판 말고 방법이 없었다. 개인소송을 결심한 이상, 더는 감정적으로만 대응할 수 없었다. 지난 10년 동안 직장생활 하며 체득한 모든 것을 동원해야 했다. 일하듯이 싸우자! 내가 할 줄 아는 모든 것을 동원해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다양한 경우의 수를 두고 작전을 짜야 했다.



 ※ 본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브런치에 게시하는 이유는 저와 같이 법에 대해 잘 모르는 저작권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본 게시물을 보시고, 임의의 매체 및 저작권법 관련 강연 등에 활용하실 경우 반드시 사전 협의 요청해주시길 바랍니다. 판결문은 SNS 등을 통해 공개하였으나, 본 브런치에 소개되는 내용은 제 개인의 정보가 있어 보다 정확하게 소개될 수 있길 바랍니다. 사전 협의 없이 사용하다 적발되는 경우, 민형사 책임을 묻도록 하겠습니다. (문의 : dearmothermusi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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