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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민 Jan 22. 2019

S#20. “판결을 듣고도 이긴 줄 몰랐다.”

판결문 낭독은 너무 빨랐고,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한 채 법정에서 나왔다.

30.

 2018년 9월 4일, 오후 2시. 회사에 외출 결재 올리고, 2호선 교대역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갔다. 재판이 진행되었던 제2별관 207호 법정에서 판결선고가 있었다. 방청석에 앉아 있는 모두가 법정으로 들어오는 판사님을 서서 맞이했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내 앞에 놓이게 될까.


 판사님은 내 사건 뿐만 아니라, 그 날 선고가 예정된 사건의 판결문을 이어서 낭독하셨다. 드디어 내 사건이다.      

“피고는 원고에게 300만 원을 지급하고, 소송비용은 이를 3분하여 그 1은 피고가, 나머지는 원고가 부담한다.”     

‘어? 이게 무슨 말이지?’


 나는 판사님의 판결문 낭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 내가 침해 인정받은 것 같기는 한데, 내가 피고의 소송비용을 2/3나 부담하면 오히려 마이너스 아닌가? 결국 판례는 남고, 돈은 더 내야 하는 것인가? 지금 내가 즐거워해도 괜찮은 건가? 전혀 알 수 없었다.      


 판결선고를 마치고 퇴장하는 판사님께 “저 딱 하나만 여쭤볼게요!” 실은 여쭤보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어떻게든 발걸음을 붙잡고 싶어 ‘딱 하나만!’이라고 말했다. 무엇을 여쭤봐야 할까.     


“저 제가 판결 내용이 전혀 이해가 안 돼서 그런데요...”

“판결문을 보면 된다.”     


 판사님은 퇴장하셨고, 나는 법원 직원에게 “판결문 언제 올라와요?”라고 물어봤다. 돌아오는 답변은 법원 직원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판사님이 올리실 거예요.”     


 현실에서의 재판이 영화나 드라마와 아무리 다르다고 해도, 이런 상황까지 놓이게 될 줄 몰랐다. 최소한 결과가 나오면 ‘당사자는 승소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거나, 못마땅해하며 화라도 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판결문 낭독은 너무 빨랐고,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한 채 법정에서 나왔다. 회사로 돌아오는 길, 멍하니 지하철에 앉아 지금까지 내가 무슨 일을 했나 싶어 한숨만 쉬었다.



31.

 사무실로 돌아와 ‘이제 재판은 그만 생각하자’고 다독이며 일부러 더 일에 집중하려 했다. 그런데 오후 4시 59분, 문자메시지가 왔다.


재판하는 동안 사건 진행 변동 있을 때마다 법원으로부터 문자 메시지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17가소7712215 판결정본이(가) 전자발송되었습니다(2018.09.04.)’ 판결문이 올라왔다!


 대법원 전자소송 홈페이지에 들어가 로그인했다. 가슴이 두근두근. 판결문은 어떤 내용일까, 분량은 어느 정도일까, 과연 내 주장에 대해 얼마나 재판부가 인정했을지 너무 궁금했다. 세상에. 판결문을 본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메시지가 판결문에 쓰여있었다. 눈물이 났다. 결국 2018년 9월 4일, 단 한 문장도 저작물이 될 수 있다는 판례를 남겼다. 나의 저작물은 재판부를 통해 창작성을 인정받았고, 대기업은 나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저작물을 게재하였기에 저작권 침해를 한 것이므로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된다는 내용이었다. 피고인 대기업은 나에게 300만 원과 이에 대하여 보도자료 배포 일자인 2017년 4월 21일부터 재판 선고일자인 2018년 9월 4일까지는 연 5%, 그다음 날부터 갚는 날까지는 연 15%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내 사건 - 서울중앙지방법원 2017가소7712215 판결정본


 사무실에서 울면 안 되니까, 심호흡하고 마음을 가라 앉혔다. 소송에 대해 알고 있는 회사 동료에게 판결문을 보여줬다. 직장동료인 변호사 A에게도 메신저로 판결문을 전달했다. 변호사 A는 “정말 주옥같은 판결문을 남기셨네요. 정말 축하드려요!”라고 했다. 변호사로부터 축하받으니, ‘아... 이제 진짜 좋아해도 되는 거구나’ 싶었다.


 판결문 한 부를 출력해서, 판결 내용 중 중요한 부분을 형광펜으로 밑줄 그었다. 그리고 스캔했다. SNS에 판결문 전문을 올렸다. 그동안 SNS에서 내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계셨다. 쉽지 않은 재판이었지만, 진심으로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SNS에 판결문을 공개한 것은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사건 초기에 ‘사건을 공론화시키며 얻는 변호사들의 의견’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판결을 받았지만, 2주 동안 피고가 항소할 수도 있었다. 역시 변호사들은 ‘피고 측이 항소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남겼다. 다만, 판결문이 나왔기 때문에 법원의 결정을 존중하는 의견이 월등히 많았다.


 작년 내 사건을 유일하게 보도해 준 한겨레신문 사회부 서대문구 담당 기자에게도 승소 소식을 전했다. 보도해도 되냐고 질문 받았고, 좋다고 했다. 피고 측의 입장도 들어보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후 한겨레신문뿐만 아니라, 법률 전문 매체, 인터넷 언론사 등에 재판 결과가 수회에 걸쳐 보도되었다. 나에게 인터뷰를 청한 매체도 있었는데, 항소기간이 남았기 때문에 섣불리 응하지 않고 나의 의견은 페이스북에 남긴 글을 참고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한겨레신문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원고인 나뿐만 아니라 피고 측의 의견도 충분히 듣고 보도해달라고 청했다.


<‘단 한 줄의 문장’에도 저작권이 있습니다> (2018.09.05.,한겨레,황금비 기자)

<[단독] 현대백화점, 손해배상청구 소송서 서울市 공무원에 일부 패소> (2018.09.05.,인더뉴스,권지영 기자)

<현대백화점, 공무원에 저작권침해 손해배상청구 소송서 일부 패소> (2018.09.05,시사포커스,이영진 기자)

<[뉴스 따라잡기] 현대백화점 광고가 패소한 까닭은 ‘창작성’> (2018.09.05.,뉴스워치,강민수 기자)

<[판결] "한 줄 문구에도 독창적 표현 있다면 저작권 인정"> (2018.09.06.,법률신문,박수연 기자)

<[지재] '음반 스티커 한 줄 문구'도 창작성 있으면 저작권 보호 대상> (2018.09.27.,리컬타임즈,김덕성 기자)


 과연 항소할까? 하지 않을까? 여기서 끝내는 게 피고도 돈과 시간이 덜 들 텐데. 기자들 취재에 응한 피고인 대기업은 ‘아직 판결문을 보지 못했고, 판결문을 본 후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2주가 흘렀고, 피고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32.

 2주, 항소기간이 지난 후에도 피고에게는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판결 선고일 다음날부터 연 15%라는 이자가 붙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기다렸다. 설마 대기업이 돈 안 주겠나 싶었다. 다만 내가 소송비를 부담해야 된다는 조항이 있어 신경 쓰이긴 했다. 1개월을 기다렸고, 10월 5일 피고에게 연락해 봐야겠다 생각했다. 어디로 연락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 맨 처음 내 저작물을 출처 없이 사용한 백화점 담당자에게 문자 보냈다. “변호사 통해 연락드리겠습니다.”는 답장이 왔다. 백화점 담당자로부터 문자가 온 후, 5분도 되지 않아 담당 변호사는 “손해배상액 지급과 관련하여 말씀 나누고자 몇 차례 전화를 드렸는데, 통화가 연결되지 않아서 문자를 남깁니다.”라며 연락이 왔다. 하루 전 날 오후, 회의 중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못 받았는데 그 번호였다. “문자 남기셨으면 좋을 뻔했네요.”라고 메시지 보냈다. 가급적 모든 내용을 기록해 두기 위해 전화통화보다는 메시지로 소통했는데, 피고 측 변호사는 통화를 원한다고 했다.


 그는 내가 부담해야 되는 소송비용을 제하고, 손해배상액을 입금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연락 기다리는 동안 친구인 변호사 E가 피고 측에서 소송비용을 제하고, 지급해도 되는지 물어볼 것이라고 이야기해 줬었다. 알겠다고 했다. 이후 피고 측 변호사에게 손해배상액 내역 관련하여 메일 받았고, 그 과정에서 궁금한 내용은 오히려 묻기도 했다. 피고 측의 지급의사가 밝혀진 상황이었고, 이 사건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법률전문가였기 때문이다.


 대법원 나홀소소송 사이트에 들어가면 <패소자가 부담하는 변호사 비용의 산정>에 관한 설명이 있다. “패소자가 부담하는 변호사 비용은 승소자가 변호사와 맺은 보수계약에 의한 금액이 아니라 다음의 기준에 의해 산정된 금액을 말합니다(「변호사보수의 소송비용 산입에 관한 규칙」 제3조 및 별표).” 참고로 <변호사보수의 소송비용 산입에 관한 규칙>은 다음과 같다. 법제처 홈페이지에서 제3조의 별표를 클릭하면 아래 이미지가 팝업창으로 뜬다.


「변호사보수의 소송비용 산입에 관한 규칙」 제3조의 별표


 나는 승소했지만 전부승소가 아닌 ‘일부 승소’하여 내가 손해배상액으로 청구한 1,000만 원 중 300만 원을 인정받았다. 1/3 정도의 금액이다. 그래서 나머지 2/3에 해당되는 피고 측의 소송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피고 측이 변호사를 5명이나 선임했어도 그들끼리 맺은 보수 계약에 의한 금액이 아니라, 법원이 정해 놓은 기준에 의해 부담하면 되는 것이다. 즉, 손해배상액인 소가 2,000만 원 이하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피고 측이 변호인에게 줘야 하는 1,000만 원 중 10%인 100만 원을 부담하면 되었다. 2018년 10월 12일, 나는 피고인 대기업으로부터 금 2,604,892원을 지급받았다.

피고 변호인에게 받은 손해배상(저) 채권계산서

33.

 2018년 12월 22일 토요일부터 브런치에 소송에 관한 글을 썼다. 소송이 끝난 직후는 살면서 다시는 법원에 갈 일이 없길 바랬다. 그런데 주변에서 작고, 큰 저작권 침해 사례가 발생하면 변호사가 아닌 나에게 먼저 물어보는 것이었다. 상호명, 캐릭터, 드라마 대본 등 문의 내용도 다양했다. 그때마다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했던 말을 또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전반적인 소송 과정뿐만 아니라, 내 사건의 특징을 고르게 전해야 하는데 그게 ‘당사자’에게 제대로 들릴 리가 없었다. 그때 많은 예술가들이 책으로 전 과정을 써 달라 요청했다. 다만, 출판사 마케터로 근무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난 출판 시장의 현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과연 이 사건에 관심 갖고 책으로 완성시켜줄 출판사가 있을까? 게다가 재판 이긴 이후, 들었던 말 중에 ‘내 사건의 특수성과 나의 개인기를 언급하며, 너니까 이긴 거다.’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승소를 기뻐해 주는 의견이기는 했지만 왜인지 모를 씁쓸함이 가시지 않았다.


 ‘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이 한 말이다. 소송 전 나 스스로를 자극하는데 도움된 말이다. 그런데 판결문 받고, 소송이 모두 끝나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권리 위에 잠자는 것이 아니라, 잠들 것을 강요받고 있었다. 재판이 끝난 후, 사람들은 나에게 ‘너니까 이겼다.’라고 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판 전 나에게 이기기 힘든 재판이라고 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사건이라고 단정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대기업인 피고의 저작권 침해보다 더 무겁게 날 억눌렀다. 삶에 있어 극단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더라도 정신 차리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주변에서 부정적인 이야기만 듣다 보면 잠들지는 않더라도 권리 위에 적당히 누워 망각하는 동물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게 되는 것 아닐까.


 소송의 전반적인 과정을 공개한다는 것이 나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무모하고 또 무모하게 음악 만들던 20대 시절 나에게 조금이라도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을 감출 것 없이 공유할 수 있어 기쁘다. 10대, 20대 시절에 창작하느라 공부를 많이 안 했던 나는 요즈음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데 종종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나의 작은 호기심을 발전시켜 보기 위해 선행연구를 찾다 보면 ‘나보다 먼저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다’라는 사실에 놀란다. 나보다 앞서 길을 걸은 이들 덕분에 내가 덜 헤맬 수 있다. 한 달 동안 브런치에 남긴 흔적도 언젠가 ‘갑자기 닥친 당혹스러운 사건으로 일상이 송두리째 흔들릴 예술가’에게 작지만 기댈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 믿으며 썼다.


 권리 위에서 잠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아야 하고,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하다. 앞으로 이 사건 판례로 인해 나와 비슷한 피해를 겪는 창작자들은 나처럼 어려운 재판 과정을 겪지 않고도 유리한 협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 판례가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으면 한다.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더 이상 어색한 일이 아니라, 상식이 될 수 있는 사회,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응원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꿈꿔본다. 그래야 세상은 조금씩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



 ※ 본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브런치에 게시하는 이유는 저와 같이 법에 대해 잘 모르는 저작권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본 게시물을 보시고, 임의의 매체 및 저작권법 관련 강연 등에 활용하실 경우 반드시 사전 협의 요청해주시길 바랍니다. 판결문은 SNS 등을 통해 공개하였으나, 본 브런치에 소개되는 내용은 제 개인의 정보가 있어 보다 정확하게 소개될 수 있길 바랍니다. 사전 협의 없이 사용하다 적발되는 경우, 민형사 책임을 묻도록 하겠습니다. (문의 : dearmothermusi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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