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한샘이 보내온 세 번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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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샘에게
속에 탈이 나서 며칠을 고생했어. 안 먹던 음식을 먹어서 그런 것 같아. 왜 어른들이 속이 놀란다는 표현을 쓰곤 하잖아? 어렸을 때는 속이 대체 뭘 어떻게 놀란다는 거야 했는데, 지금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너무 잘 알겠는 거 있지. 막 아우성을 치는 느낌이더라고. 이미 어른이 된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경험하고 나서야 이해하게 되는 어른의 언어가 있다는 게 신기해. 아무튼 남은 일정 동안 부디 먹는 것을 조심해. 속 놀라지 않게.
그림같이 펼쳐지는 피렌체의 모습과 흑백사진에 가까운 제네바의 모습이 너무 극명하게 갈려서 재미있었어. 제네바의 우울한 하늘빛과 비싼 물가에, 그간 알게 모르게 쌓였을 피로가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어 너의 몸 위로 내려앉은 것 같아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안시의 파란 하늘과 함께 기운을 찾은 모습이 느껴졌지. 비록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절반밖에 좋아하지 못한다고 썼지만 말야.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너를 끌어당기는 책 한 권은 당연히 구매했겠지? 너를 위한 이탈리아어 수업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잘 안 들리고 잘 안 보이더라도 일단은 그래, 최선을 다해 즐겨보렴. 안시의 이야기가 더욱 많이 담겨있을 다음 편지를 기대할게.
제네바에서 너를 힘들게 한 비는 사실 여기에 너무나 필요한 비였어. 두 달이나 계속된 가뭄에 쫙쫙 갈라진 논바닥, 기운을 못 차리는 농작물, 연이어 들려오는 화재의 소식. 그 모든 것이 지구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데도 4월부터 에어컨을 트는 곳이 생겼고, 심지어 추워서 긴 옷을 챙겨 다녀야 하는 곳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작은 불편도 감내하기 싫어했던 사람들은 제대로 수확이 되지 않을 가을이 오면 치솟는 채소와 과일의 가격 앞에 서서야 기후위기를 실감하고 후회하려나.
나는 요즘 몸의 움직임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몸을 정말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지. 만성 허리 통증과 디스크를 핑계로 (사실이긴 하지만) 잘 걷지도 않고, 피곤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는 이유로 집에서 하는 운동도 하지 않으니 말야. 대부분의 시간을 앉아서 보내고, 가만히 누워있다 보면 이러다 그냥 납작해져서 등이 닿아 있는 면에 흡수되어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곤 해. 며칠 전 무거운 책이 든 가방을 두 개나 들고 몇 시간을 걸을 일이 있었는데, 허리에 바로 무리가 되었는지 이틀을 극심한 허리 통증에 시달리느라 꼬박 밤을 새야 했어. 그리고 드디어 쪽잠이라도 자게 된 밤을 지나 마음을 먹었지.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스트레칭을 하겠노라고. 뭔가 위협을 느껴야 행동하는 부류가 있다면 그게 바로 나야. 마음먹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폼 롤러를 등에 대고 누웠는데 꺅 소리를 질러버렸어. 뼈가 우두둑 갈리는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 몸은 나의 것이면서도 나의 것이 아닌 느낌이야.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몸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다. (그들은 나 같은 사람들을 신기해하겠지)
예술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은 너무 짧아 이렇다 할 기억이 많지는 않지만 굉장히 깊게 새겨진 무용반 담임이셨던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 학교는 음악과, 미술과, 무용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음악반의 수가 가장 많고 무용반은 단 한 반이었어. 선생님이 어떤 과목 담당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첫 수업에서 하신 그 말씀이 강하게 내 안에 들어와 박혔고, 그 후로도 몸을 움직이는 사람을 볼 때면 항상 그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났어.
“무용은 보고 듣는 것을 모두 이해하고 표현하는 종합 예술이다. 그 어떤 예술보다 고귀하고 어렵다.”
이 멋진 문장 뒤에 그러므로 무용은 음악이나 미술보다 어려운 분야라고 재차 강조하시며 불필요한 비교를 덧붙이셨기에 듣기 불편해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내게 저 말이 얼마나 강렬하게 와닿았는지 바로 그 순간부터 무용과 친구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동경과 존경이 더해지게 되었다니까.
오래전에 그 선생님이 하셨고, 내게 와서 각인되었던 그 말을 다시 떠올린 건 최근에 읽은 책과 영상 때문이야. 몇몇 동료들과 함께 책을 읽는 모임을 하고 있는 건 너도 알지? 다음 모임에 읽자고 권하신 책이 1940년에 태어난 독일 출신의 무용가 피나 바우쉬 (Pina Bausch, 1940~2009)에 대한 책이었어. 관련된 책이 한 권뿐이기도 하고, 유명한 안무가이자 무용가이다 보니 책보다는 눈과 귀로 접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유튜브에서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는 중이야. 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앙상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마른 몸으로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순간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어. 내 숨이 영상 안의 움직임을 방해할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힘을 얻을 만큼 모든 장면이 압도적이었어.
고귀하고 어려운 종합예술.
이 표현에 딱 맞는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춤, 춤이 아니면 우리는 길을 잃는다.”라는 피나 바우쉬의 말을 생각해 봐. 질문을 던지고 춤으로 대답을 하려던 사람. 사람들. 피나 바우쉬는 1979년에 한국에 처음 공연을 하러 왔었고, 2000년부터 2005년 사이에 다섯 번을 다시 공연차 찾았다는데 나는 그때 이런 예술을 접할 기회를 다 놓치고 대체 뭘 한 걸까. 아니 그 이전에 로마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길을 잃은 게으른 자였던 것이 분명해.
오늘 편지는 조금 짧게 마쳐야겠어. 편지 시작에 적은 것처럼 놀란 속 때문인지 쉽게 피곤해졌거든.
피렌체는 이탈리아에서 살던 로마를 제외하고는 가장 자주 가 본 도시이고 두오모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미켈란젤로 광장 역시 여러 번 가 본 곳인데, 나는 그곳에서 보던 아르노 강과, 내려다보이는 갈색 지붕과 노란 벽들에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석양을 잊고 살았어. 너의 글이 나를 다시 그곳으로 이끌었고 그 순간 나도 어쩐지 조금 순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았지. (비록 내게 남아있는 피렌체의 사진들은 모두 흐린 날 뿐이지만 말야. 사진은 2004년 피렌체란다.)
시간을 많이 건너뛰어 같은 장소에서 담은 마음을 기억하게 되어 우리는 나눌 이야기가 더 많아지겠다.
지금 한낮을 지나고 있는 너는 어떤 이야기를 찾아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다음 편지에서 또 풍성한 길 위의 이야기를 나누어 줘. 전혀 지루하지 않으니.
2022. 06. 08
한샘이 한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