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프링 Jun 05. 2022

3. 최선을 다해보고 있는 날들이야

한샘이 한샘에게

https://brunch.co.kr/@quartet/105


한샘에게     


 일단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언니의 이번 편지 마지막 부분을 읽고는 입으로 “뜨악”소리를 냈다는 사실을 전해. uno, due, tre,..., cinque,..., dieci... 세상에! 10은 디에치이고 첸또는 100이었지!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그걸 다시 편지로 쓰는 순간에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음 그래도 내가 1부터 10까지는 이태리어로 알고 있구나!’ 이러고 있었거든. 나의 그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은 뭐였을까?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는걸. 십 유로 지폐를 들고 첸또, 첸또 거리는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했던 기사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면서 내가 왜 택시에서 못 내리고 있었는지 알 것만 같네.

 선생님께서 이태리에 가기 전에 숫자만큼은 다시 보고 가라고 말씀해주셨건만 많이 모자라기만 한 이 제자는 무식이 이렇게 들통나버리네요. 열심히 가르쳐주신 선생님 앞에서 부끄럽기만 합니다 (꾸벅).      


 지난번 편지를 피렌체에서 보내고 난 후 난 피렌체에서 3박 4일을 지낸 뒤 스위스 제네바와 프랑스 안시에서 각각 2박 3일을 보냈어. 그리고는 앞으로 일주일은 파리 근교의 지역을 차로 여행할 거라 어제 기차를 타고 일단은 파리로 왔지. 일주일간 색이 완전히 다른 세 나라를 경험하고 있으니 새삼스럽게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게다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여정이다 보니 해지는 시각이 확연히 늦어지는 걸 경험 중인데 피렌체에서 8시 40분쯤 지기 시작했던 해는 제네바에서는 9시 15분이 넘어서야 졌고, 파리에선 밤 10시가 다 되도록 하늘에 빛이 남아있었어. 한낮의 빛이 저녁 8시에도 가득하다는 사실이 내가 지금 집을 떠나 있다는 걸 실감하게 해. 언니도 알다시피 나는 10시가 되어가면 잘 준비를 하는 사람이잖아? 여행 내내 내가 잘 시간이 가까워 오는데도 하늘이 훤하다는 사실이 이렇게 어색할 수가 없어. 누우려고 하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있는 듯한 어색함에 자연스레 늦게 자게 되더라고. 그리하여 드디어 일시적 12시 취침자가 되었다는.

 피렌체는 꽃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구석구석 모든 게 아름다웠는데 역시나 두오모로 유명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은 그 자체가 피렌체의 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었어. 그동안 각종 여행 프로그램에서 많이 봐서 가보기도 전에 이미 친숙해져 버린 곳인 데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아오이와 준세이가 다시 만난 낭만의 장소로 너무 많이 소비되어 두오모의 쿠폴라를 직접 봐도 시큰둥하면 어쩌나 했었는데 기우였어. 어느 각도에서 봐도, 보고 또 봐도 새롭고 대단하게만 느껴지던 이 성당 주변을 피렌체에 머무르는 동안 얼마나 많이 돌고 돌았는지 모르겠어.

 준세이와 아오이처럼 나도 서른이었다면 좁디좁고 가파른 계단의 공포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에 올랐을까? 막상 두오모가 눈앞에 있었지만 그곳을 내가 밟고 올라서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더라고. 게다가 올라가 본들 오래전에 누군가와 해둔 약속도 없고, 나만의 멋지고 새로운 준세이가 나타날 리도 없잖아. (준세이 대신 내 옆엔 자기는 그 계단 통로를 올라가다간 숨 막혀 쓰러질 거라며 밑에서 응원을 하고 있을 테니 나 혼자 올라가라던 (영)준이 있을 뿐). 두오모에 오르는 대신 우린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두오모보다 높은 위치에 있던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보냈어. 거리 음악가가 기타로 연주하던 제목은 알 수 없지만 익숙한 음악이 BGM이 되었고, 저녁 햇살이 내려앉으며 서서히 더 붉은 갈색으로 물들어가던 피렌체의 아름다움에 할 말을 잃었던 시간이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될 것 같아.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 힘들고 팍팍한 시간을 보내야만 할 때 아르노 강이 흐르고 두오모가 중후하고 아름답게 중심을 잡고 있던 피렌체를 내려다보던 순간을 떠올리면 나는 조금은 더 순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태리의 로마와 피렌체에서 내내 경험한 환상적인 날씨와 마음의 흥분상태는 제네바에 이르러 가라앉았지. 그동안 스위스는 여러 차례 여행하면서 나름 많은 곳들을 가본 편이었는데 제네바는 이번이 처음이었어. 영준의 일 때문에 여행지 사이에서 잠시 들르게 된 곳인지라 별다른 기대 없이 가긴 했지만 가보니 스위스의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있었던 목가적인 풍경도, 아기자기함과 정겨움도 모두 사라진 그야말로 '도시'였어.  게다가 물가는 어찌나 비싼지 첫날 저녁에 뭘 먹어도 비슷한 돈이 들겠다 싶어 호텔 바로 근처 한식당에 갔어. 국물 같은걸 한번 먹으면 왠지 더 잘 다닐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렇지만 김치찌개와 만둣국 두 그릇을 물도 반찬도 없이 먹고는 십만 원도 더 되는 돈을 내고 나니 뭐랄까 그동안 누적된 여행의 피곤함이 급격히 몰려왔다고나 할까? 여행 와서 한식당을 찾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그 모험을 물가 제일 비싼 제네바에서 해버리다니. 차라리 모르는 맛을 먹을걸 그랬어. 어찌나 돈이 아깝던지.

 제네바는 듣던 대로 온갖 은행들과 하이엔드 명품 매장, 갤러리들이 즐비해 한눈에 보기에도 부가 넘쳐흐르는 곳처럼 보였는데 너무나 단정하고 반듯했지만 한치의 오차도 허용할 것 같지 않는 듯한 엄격함에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언니가 읽은 책에서 도시는 이방인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움직이는 곳이라고 했지만 이곳은 이방인들이 모였으되 서로 곁을 내주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달까.

 다행히 도착했던 날 저녁엔 화창해서 이태리에서와는 또 다른 느낌의 눈부신 햇살과 맑고 시원한 공기를 경험해서 좋았는데 밤부터 있는 내내 비가 계속 내리고 추워서 몸과 마음이 더 움츠러졌던 거였는지도 몰라. 호수와 산맥의 영향 때문인지 제네바의 일기 예보를 보니 일주일 내내 비비비. 폭우는 아니어도 부슬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했는데 하영도 "엄마 제네바는 칙칙해." 이러면서 호텔에 계속 머물러 있으려고만 했어. 그렇게 셋이 어두운 호텔에서 어두운 마음으로 각자 앉아서 자기 할 일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어. 지금 생각해보니 제네바에선 카페 한번 안 갔지 뭐야. 낮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노천카페에 앉아 비싸도 커피를 한 번쯤은 마실 수도 있었을 텐데 아예 그런 생각조차 안 들었으니 내가 제네바에선 마음을 닫고 있었던 게 맞나 봐. 한 가게에 들어갔다가 천장에 붙어 있던 프랑켄슈타인 포스터를 보고서야 '아 맞다. 프랑켄슈타인이 제네바 무슨 가문 출신이었지.' 하며 책의 기억을 더듬거려보았는데 프랑켄슈타인의 어둠과 우울이 제네바의 날씨에 영향을 받은 건 혹시 아닐지. 단 며칠의 겉보기 경험으로 그곳을 판단해버릴 수는 없지만 어쨌든 제네바에 대한 나의 인상은 70% 카카오 맛.

 확실히 여행의 기쁨은 하늘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했어. 내가 밟고 있는 땅이 어디냐에 따라 다 다른 하늘의 표정이 신기하기만 해. 이태리에서 내내 맑고 투명했던 하늘 덕분에 그곳에서의 시간들은 더 반짝임으로 남아 있는 것 같고 말이야. 지난 편지에서 언니가 함께 보내준 그곳의 티 없는 파란 하늘 사진을 한참을 보았어. 그래, 그런 하늘 아래 있어야 우리는 힘이 생기는 것 같아. 여기서 나만 맑고 파란 하늘을 누린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노란 불빛의 책방 안에서의 시간도 너무 좋지만 하늘이 맑은 날은 잠시라도 밖으로 나와서 꼭 그 하늘이 주는 기쁨을 느꼈으면 좋겠어. 단 하루도 같은 하늘은 없으니 '고유의 순간들'을 만끽하길.


 여행지 얘기만 주르륵 늘어놔서 지루할지도 모르겠네. 그렇지만 형평성에 맞게 오늘 편지에선 남은 한 곳의 이야기를 계속해보도록 할게.

 안시라는 곳은 제네바에서 30여 킬로 떨어진 프랑스 지역인데 프랑스의 ‘작은 알프스’ 정도로 불리는 곳인가 봐. 눈 쌓인 산으로 둘러싸인 큰 호수에서는 사람들이 여러 배를 타고 있었는데 호수와 산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좋은 휴양지처럼 보였어. 마을의 구시가지 안으로는 강을 따라 정비된 수로가 있는데 그 한가운데 12세기에 지어진 감옥이 있는 풍경이 이 마을의 하이라이트이자 포토존이지. 예쁘고 아기자기한 딱 프랑스 시골마을 분위기가 가득해서 제네바가 안겨준 무뚝뚝함을 이곳에서 다 떨쳐낼 수 있었어.

 마을 안에는 작은 책방이 두 곳 있었는데 그중 한 곳은 입구 쪽 벽면에 여성 작가의 흑백 사진을 빼곡히 붙여두었더라고. 시몬 베유, 버지니아 울프, 에밀리 디킨슨, 시몬 드 보부아르, 까미유 끌로델, 패티 스미스 정도를 알아볼 수 있었어.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집중하는 책방이었을까? 책방 한쪽엔 빨간 포장지로 포장된 비밀 책으로 추정되는 책들이 담긴 바구니도 있었어. 각각의 책 포장 위엔 검은 글씨로 무언가가 쓰여있었는데 아마도 포장 속 책을 가늠해 볼 수 있는 힌트가 적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언제 어디서든 작은 책방들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끌리고야 말지만 이렇게 외국 여행 중에 책방을 만나도 절반밖에 좋아할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언어 때문일 거야. 책이 쌓여 있어도 그 이미지에 끌릴 뿐이지 제목과 작가의 이름을 봐도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주는 슬픔 같은 게 느껴져서 말이야. 맛있고 좋은 먹을 게 쌓여 있어도 그걸 먹지 못하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그런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이태리어와 불어만이 보이고 들리는 시간 동안 나는 내 원래 존재의 절반 이하로 작아져 있다는 생각을 했어. 작아졌다는 말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쪼그라들어버렸다는 게 더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 읽을 수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도, 내 뜻을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희뿌연 상황들 속에서 심리적으로는 무척이나 위축되어 있고, 평소에 포커페이스인 나에게 어색한 미소와 눈짓이 늘고 있는 중이야. 제발 여행이 끝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말아야해.

 눈으로 들어오는 것들은 낯설고도 아름답지만 그것들을 둘러싼 언어가 내겐 고작 백색소음으로만 들리는 상태에서 내가 이 아름다운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어. 이곳의 언어들을 이해하고 말할 수 있다면 지금보단 더 넓고 깊은 세상을 만날 가능성 역시 커질 텐데.

 역시 여행을 하다 보면 늘 언어를 배우는 일에 관심이 없었던 날들이 후회되기도 해. 이 후회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디에치와 첸또를 제대로 말할 수 있도록 이태리어를 새로 다시 배울 수 있는 동기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강력하게 말 못 하겠는 이유는 자극을 받고 결심을 해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렇듯 말이 앞서 작심삼일이 되고야 마는 나를 내가 너무 잘 알기에......)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언어에 대한 간절함이 좀 더 커져있지 않을까. 아마도 그렇겠지? 그러고 나면 "선생님 저 이태리어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싶어요." 하면서 언니에게 연락할지도 모르겠어. 나 이태리 또 가고 싶은데 또 10유로짜리를 흔들며 "첸또 첸또" 이러다간 사기꾼으로 잡혀갈 수도 있을테니 그러기 전에!


2022. 06. 04.

한샘이 한샘에게.


매거진의 이전글 2. 나 로마에 반한 거 같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