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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 Jun 12. 2022

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한샘이 한샘에게

 https://brunch.co.kr/@quartet/106


한샘에게     


 놀란 속은 지금쯤은 잘 가라앉았는지 모르겠네. 허리 통증은 어떤지도 궁금하고. 속이 아우성을 쳤다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언니가 속 탈이 잘 나는 편이라 나아졌어도 또 그러기 쉬우니 정말 조심하기 바라. 건강히 최고란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점점 느껴. 어쩌면 그게 전부일지도 모르겠어. 우리 건강해서 오래오래 함께 책도 읽고 수다 떨고 술도 마시면서 노년을 함께 해야지.

 나는 다행히 지금까지는 몸에 별 무리 없이 여행을 잘하고 있는 편이야. 먹고 있는 것들이 이태리 음식이든 프랑스 음식이든 특별히 맵거나 기름지거나 자극적인 건 없어서 그런 거 같아. 다만 이제 난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떡볶이가 좀 많이 먹고 싶어 졌다는 거. 가을에 만나면 우리 함께 떡볶이를 꼭 먹자고! 맥주와 함께.


 요즘 몸의 움직임에 대해 생각한다니 그 책 모임의 피나 바우쉬 책이 언니가 지난번 편지 속에 같이 보내준 사진만큼이나 강렬했나 봐. 나는 피나 바우쉬를 지난봄에 읽었던 목정원 작가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에서 처음 들어봤던 거 같아. 내 기억이 맞다면 작가가 니진스키의 봄의 제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피나 바우쉬도 언급했던 거 같은데 그 지점에서 궁금해서 텍스트로 찾아봤던 게 전부였던 거 같아. 언니가 편지와 함께 보내준 흑백 사진 속 그녀의 팔과 손 근육의 모습을 한참 들여다보면서 피나 바우쉬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예술을 했었는지 무척이나 궁금해졌어.

 가끔 춤을 잘 추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멋있어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난 댄서가 되겠어’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을 실제로 하곤 해. 내가 지금 생에서 가장 못하는 게 몸을 움직이는 일이라 다시 태어날 거 이왕이면 아예 완전 새로운 사람으로 탈바꿈해야겠단 생각에서 말야. 하지만 몸의 움직임에 자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것 같아. 몸을 움직이질 않으니 그런 생각이 특별히 들 리가 없었던 거겠지.

 피나 바우쉬가 했다는 ‘춤, 춤이 아니면 길을 잃는다.’라는 말, 언니 선생님의 ‘무용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예술이다.’라는 말을 들으니 춤을 추는 사람들이 춤을 출 수 없거나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 때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하는 경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게 어떤 의미의 고통일지 이제야 어렴풋이 다가오는 것 같아. 내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그 어떤 제3의 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영역. 춤을 추는 사람에겐 자신의 몸이 곧 세계인데 그 세계가 갑자기 단절되는 고통, 세계로 나아갈 길을 잃고 언어를 잃는 고통. 이건 여행에서 잠시 길을 잃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고통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일 테지. 돌아가면 나도 피나 바우쉬의 책을 읽어봐야겠어.       


 다행히도 이번 여행에서 아직까지 별다른 큰 일은 없었어. 안시에서는 18세기에 지어진 구 시가지 안의 에어비앤비를 예약해 뒀었는데 매우 예쁘고 깔끔했지만 화장실 변기 물탱크가 고장 나 있던 바람에 급히 환불받고 숙소를 옮긴 걸 빼면 말이야. 하마터면 아름다운 안시의 추억 속에 x물이 끼얹어질 뻔했지만 이 정도면 아무 일도 아닌 셈이지.

 나의 유럽 여행은 이제 후반부를 향해 달리고 있어. 한 달 간의 유럽인데 이태리에서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듯하더니 어느새 가속이 붙어 나는 지금 그 한 달의 마지막을 장식할 파리에 와 있어. 그저께 파리로 와서 하루는 호텔에서 자고 어제부턴 열흘 간 머물 파리 5구의 한 아파트에 들어왔어. 이번엔 잠시 동안 ‘파리 5구의 여인’ 이 되어볼게.      

 지난 한 주간 나는 파리에서 150킬로미터쯤 떨어진 일리에-콩브레(Illiers-combray)라는 시골 마을과 노르망디 해변의 카부르(Cabourg)에서 마르셀 프루스트와 함께 했어.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들을 찾아보고, 소설 속에 묘사된 것들이 실제와 얼마나 비슷한 지도 살펴보고, 전지적 프루스트 시점이 되려고 애써보면서. 이게 이번 여행의 최대 목적이자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었지. 프랑스에 온 김에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결국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프루스트의 자취를 찾아보자는 게 나의 큰 그림이었거든. 올해는 프루스트 사망 100주년이기도 하고 민음사에서 나오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시리즈가 완간될 예정이라고도 하니 나름 프루스트를 찾는 여행의 구색이 맞춰진 셈이지.

 언니도 알다시피 내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한 친구와 윤독하고 있잖아. 일주일에 한 번 만나 읽기 시작했지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았던 문장 속에서 길을 잃었고, 꾸역꾸역 3권까지 읽고는 대체 무슨 소설인가 싶어 중간에 열 달이나 그만뒀었거든. 그러다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그 후로 점점 빠져들게 되었어. 실타래의 끝을 꼭 쥐고 있지 않으면 금세 무슨 말인지 모를 그의 문장들이지만 어느새 그게 매력이 되어 결코 중간에 읽기를 그만둘 수 없는 마력에 빠지고야 만 거야. 총 13권까지 나올 예정이고 나는 지금 7권을 읽는 중. 나도 내가 프루스트 덕후(?)가 될 줄은 몰랐어. 이젠 날 ‘프덕’이라고 불러주길 바라.


 성인이 된 마르셀은 어느 날 어머니가 준 보리수 차에 마들렌을 찍어 먹는 순간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가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셨던 마들렌 조각의 맛을 떠올리고는 어린 시절 그에게는 하나의 오롯한 세상이었던 콩브레에 대한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는 시작되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프루스트의 ‘콩브레’ 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해야 할 것 같아. 소설, 특히나 1편인 <스완네 집 쪽으로>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콩브레에서의 기억으로 가득한데 가보니 마을은 여전히 <스완네 집 쪽으로> 속 수많은 문장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어. 현실이 소설인지 소설이 현실인지 헷갈릴 정도로 말이야. 비록 공사 중이었지만 레오니 아주머니의 집, 스완네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다리와 게르망뜨 쪽으로의 평원, 어릴 적 놀던 옛 콩브레 영주들의 허물어져 가던 성, 비본 냇가와 산사나무, 할머니와 함께 기차를 타고 도착했던 콩브레 기차역, 기차역 앞의 공원, 그리고 마을 한가운데 있는 그의 말에 따르면 ‘후진 성당’인 생자크레 성당.......

 이 마을의 실제 이름은 원래 일리에였지만 프루스트 탄생 100주년을 맞아 마을 이름을 아예 일리에-콩브레로 바꾸었다고 하니 이곳이 얼마나 프루스트와 그의 소설 속에 젖어 들어 있는 마을인지는 감이 오지?  

  

 '소설이 실제 마을의 이름을 딴 게 아니라 실제가 소설 속 마을의 이름으로 바꾼 곳인 만큼 사람들이 많겠지?, 프루스트 관련 기념품은 뭘 사볼까?, 마들렌과 홍차를 먹을 수 있는 예쁘고 오래된 카페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불안으로 바뀌었어. 정말 아무것도 없었거든.

 마을은 프루스트 소설 속 장소들로 가득 차 있어 그에게 관심 있는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긴 해도 결코 관광지는 아니고 워낙 작고 다른 마을과는 동떨어진 시골이었기에 마을 안엔 볼거리도, 사람도 거의 없었어. 아마 나를 본 마을 사람들 중엔 아니 ‘웬 동양 여자가 며칠을 이 마을에서 뭐 하는 걸까?’ 궁금해했을지도 모르겠어. 프루스트의 자취를 찾는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지루함과 나른함 그 자체인 이 마을에선 반나절도 머무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나도 했거든.     


 어린 마르셀의 눈에는 이 마을은 무척 큰 세계였을 거야.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스완네 집 쪽으로 가는 메제글리즈 방향의 산책길과 게르망트 공작의 집으로 가는 게르망뜨 쪽으로의 산책에 대한 이야기가 장황하게 나와. 그 길 위에서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수많은 것을 보고 생각하기에 마르셀의 산책길이 무척이나 긴 길인가보다 했는데 직접 가서 보니 그의 집에서 얼마 되지 않는 거리더라고. 그도 커서는 나중엔 그걸 느껴.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곳이 실제로는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도, 서로 완전히 반대방향인 줄만 알았던 메제글리즈 산책길과 게르망뜨 쪽이 실은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도. 아마도 어릴 적에 그렇게 크게 느껴지던 초등학교 운동장에 어른이 되어 다시 가보면 그때의 그곳이 맞나 싶게 작게 보이는 것과 비슷한 거겠지.

 큰 꿈을 품고 넓은 세계로 나가는걸 최고이자 성공으로 여기는 세상이지만 작은 세계를 크게 느낄 수 있었던 어릴 적 눈과 마음이 그리워. 멀리 나가지 않더라도 내가 사는 동네 안에서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들의 향기에 감탄하고, 구름을 보며 길을 걷고, 동네 안의 어떤 인물을 동경해보기도 하고, 또 누군가와의 사랑을 꿈꾸기도 하고., 그게 세상의 전부인줄 알았던 그런 시절이.

 소설의 마르셀은 어린 시절 콩브레에서의 아름답던 시간을 잃고 젊은 시절을 허송세월 한 뒤 나중에서야  글을 쓰며 그 시간들을 되찾는 여정을 떠나. 길을 잃고 시간을 잃어버려 봐야지만 그 중요성을 알게되는걸까? 이제야 집떠난지 한달이고 앞으로도 두 달 이상의 시간을 더 보내야 돌아가지만 돌아가게되면 길을 떠나는 것만을 꿈꿀게 아니라 매일매일의 일상에 더 집중하며 평범한 삶의 공간과 시간들을 아름답게 채워가려고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되네. 거리의 피고 지는 꽃과 나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면서, 매일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훗날 생각했을때 잃어버린 시간들이 그리 많지 않도록, 그리고 잃어버린게 있다면 되찾으려고 하면서.

 

파리에서 한샘이가 한샘에게.

2022. 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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