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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 Jun 19. 2022

5. 파리는 한 권의 책

한샘이 한샘에게

(정)한샘이 보내온 네 번째 편지

https://brunch.co.kr/@quartet/107


 한샘에게,    


 한국은 이제 곧 장마철이 시작되는 건가? 조금 전에 서울의 날씨를 살펴보니 다음 주부터는 비 오는 날이 많아지네. 비 오는 날, 특히 장마가 이제는 언니 몸이 겪어내야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책들에게도 더 신경을 써야 하는 시기가 되어버렸으니 비가 계속 올 날들을 앞두고 부담이 더 커졌을 거 같아. 그 와중에 비 오는데 좋은 마음으로 걸을 수 있었다니 나는 언니의 그 마음을 반겨. 비 오는 중에 언니가 어느 길을 걸었던 거였는지도 궁금해지네. 비 오는 날 걷는 일이 거추장스럽고 쉽지는 않지만 적당한 비 아래서 걸을 때면 자연과 거리의 모든 것들이 더 선명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 비록 하늘은 어둡지만 햇볕 아래에선 사방으로 반사되던 색깔들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도 물에 젖어 그 색이 진해지는 느낌. 그래서 거리도, 길가의 나무도 꽃도 더 선명해 보여서 같은 거리도 다르게 느껴지는 그 느낌을 나는 좋아해. 물론 비 오는 정도가 선을 넘으면 그때부턴 얘기가 달라지지만 말이지. <날씨의 맛>에서 “그것이 식물에 좋다면 나에게도 좋은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소로의 말이 인상적이야. 언니의 SNS에 요즘 부쩍 식물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거 같은데 사진 속 그 여리여리하고 푸릇한 아이들에게 좋은 날씨라면 그건 정말 우리에게도 좋은 날씨 맞네!

 파리에 있는 중엔 아직 비를 만나지 못했어. 짧게 여행하는 여행자에게 비는 방해꾼이 되기 쉽지만 그래도 이쯤에서 비에 젖은 촉촉한 파리의 모습도 한번 보고 싶어 졌어. 여긴 요즘 해가 10시는 되어야 지기 시작하고, 10시 반은 되어야 어둠이 깔리는 탓에 저녁 5~6시가 하루 중 가장 기온이 높더라고. 그 시간 즈음엔 어지러울 정도로 강렬한 빛이 내리쬐는 바람에 눈을 뜨고 다닐 수가 없을 지경인데 엊그제는 그 시간에 걸으면서 소나기라도 한번 쫙 내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러면 비를 피해 노랗고 하얀 줄무늬 차양이 내려진 길모퉁이 아무 카페로 뛰어들어가 그 아래 놓인 작고 동그란 테이블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비에 젖어가는 파리의 거리를 홀로 조용히 감상하리라고 상상해보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아무래도 촉촉한 파리를 보지 못한 채 이곳을 떠나게 될 것 같아.   


나는 많이도 걸었다. 지하철과 버스가 드물게 다니기도 했지만, 그냥 걷는 게 좋았다. 코에 바람을 느끼며 산책을 하다 보면 도시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건물의 꼭대기 층들은 고유의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어, 건물의 아래 부분과 별도의 존재처럼 보인다. 그 층들은 하늘에 걸터앉은 별개의 도시를 이룬다.

로제 그르니에, <나의 위대한 도시, 파리>

 

 파리를 위해 들고 갔던 단 한 권의 책은 작년 여름 리브레리아Q에서 발견한 로제 그르니에의 <나의 위대한 도시, 파리>였어. 나도 많이도 걸었어. 열흘동안 파리 곳곳을 걸었어. 로제 그르니에의 말 그대로 그냥 걷는 게 좋았어. 오전 시간엔 주로 셋이 함께 다녔고 점심을 먹고 난 뒤 오후엔 주로 나 홀로 다녔어. 네 번째 파리였기 때문에 어떤 유명한 장소들을 찾은게 아니라 플라뇌르의 여성형 '플라뇌즈'가 되어 그냥 계획 없이 정처 없이 골목들을 걸었지. 누군가 파리를 보고 싶으면 에펠탑과 루브르, 노트르담과 바스티유로 가라고 했고, 파리를 알고 싶으면 뒷골목으로 가서 길을 잃으라고 했던 말을 생각하면서. 예전에는 파리도 골목이 많고 오래된 도시라는 느낌이 강했었는데 이번에 로마와 피렌체를 거친 뒤 파리로 가니 확실히 이곳은 로마에 비하면 신도시이자 계획도시구나 싶더라. 개선문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은 차도와 보도는 넓었고, 골목이라 해도 로마만큼 좁거나 얽혀있던 건 아니어서 비교적 길눈이 밝은 나는 뒷골목으로 가도 길을 잃지 않았던 거지!

 짧고 좁은 골목들이 계속 연결되어 있어 걸으며 예기치 못한 새로운 길들을 계속해서 만날 수 있다는 측면에선 로마에서의 걷기가 무척 흥미로왔고, 베스파나 자동차 경적소리가 덜 들려서 좀 더 편한 마음으로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건 파리였던 거 같아. 어쨌든 고독한 산책자가 되어 몽상을 하며 낯선 거리를 걷는 시간만큼 삶에 짜릿한 순간이 또 있을까? 이게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해. 내가 마음을 연다고 모든 도시가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로마나 파리는 여행자나 걷는 자에게 관대한 도시인만큼 자유롭고 편안한 상태에서 작은 발견들에 즐거워하며 발걸음 닫는 대로 걸을 수 있었어.


 정수복 선생님의 <파리를 생각한다>를 보면 '진정한 산보객이란 특별히 살 물건도 없으면서 상점의 진열장을 들여다보고 특별히 살 책도 없으면서 서점에 들어가서 이 책 저 책의 책장을 넘기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나와. 특별히 살 물건도 없으면서 상점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다 파란 원피스를 하나 샀고, 특별히 살 책도 없으면서 서점에 들어가서는 당연히 빈손으로 나오지 못했지. 십여 년 전에 저 책을 읽으면서 ‘파리에서 헛걸음은 없다’라는 말이 워낙 깊게 박혀 그 후엔 어디에서든 걷는 자에게 헛걸음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역시 파리는 걷는 맛이 확실히 풍부하다고나 할까. 걷다 너무 햇살이 눈부시거나 다리가 아프면 아무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한잔 마시거나 낮술을 시켜놓고는 방금 전 책방에서 사 온 읽지도 못할 프랑스어 책을 뒤적거려보던 시간은 이 모든 산책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었고.   

 아, 에스프레소를 비롯한 커피의 맛은 왠지 모르게 이태리가 조금 더 맛있는 게 아닐까 싶었어. 쌉쌀하면서도 고소한 그 맛이 로마에서 더 깊게 느껴졌거든. 아직까지 내가 에스프레소를 비교하고 논할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로마에서는 머물렀던 호텔 방 안에 있던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내린 커피마저도 “대체 이 커피 맛 뭐지? ”하며 놀랐었거든. 이태리 커피 맛의 비결은 무엇일지. 기분 탓은 아닐 테고 말야. 이태리에서 모카포트를 새로 하나 살까 말까 하다가 안 샀는데 샀어야 했나? 이태리제 모카포트로 커피를 내려마신지 15년은 되었지만 모카포트 문제가 아닌 거겠지?


 파리에선 생각해놨던 몇몇 프루스트의 흔적과 전시를 보는 것 말고는 문학이나 영화와 관련된 뭔가를 찾아보는 일은 따로 하지 말자고 생각했었지. 뭐라도 하나 찾기 시작하면 내가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끝도 없이 나올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성공하진 못했어. 문학적 자취로 가득한 파리에서 그것들을 피해 가는 게 오히려 어려운 일이겠구나 싶더라. 그냥 별생각 없이 우연히 들어선 골목 안에서 폴 베를렌이 죽을 때까지 살았던 집을 발견했고, 그다음 골목으로 들어섰을 땐 헤밍웨이가 첫째 부인 해들리와 함께 아직 유명 작가가 되기 전 신문기사의 원고료를 기다리면서 살았던 집이 있었지. 계속 그런 식이었어. 시몬 드 보부아르가 지나가고, 거투르트 스타인이 나오고, 가브리엘 콜레트가 등장하고, 들렸던 백화점은 에밀 졸라의 <여인들의 행복백화점>의 모델이었던 백화점이었고......  머물고 있는 집에서 길을 건너 조금 올라가다 보니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에서 밤 열두 시 클래식 푸조가 멈춰 서며 주인공이 1920년대의 파리로 넘어가던 그 장소가 있었고 심지어는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는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서 주인공이 사는 그 동네까지도 걷다가 우연히 만날 수도 있었지. 내친 김에 난 영화 '비포 선셋'에서 제시와 셀린이 9년만에 파리에서 재회해서 갔었던 Le pure cafe 에도 다녀와봤어. 지난 주 피나 바우쉬에 대한 언니의 편지를 읽고는 그 다음날 들어갔던 어느 책방에는 그녀의 모습이 아주 큰 사진으로 걸려있었던걸 보고 놀라기도 했고. 신기한 일이었지. 내가 오래전에 메모장에 적어둔걸 보니 발터 벤야민은 '파리만큼 책과 내밀하게 연결된 도시는 없다'고도 했다는데 파리는 한 권의 큰 책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블룸스 데이 100주년을 직접 경험한 일이었어. 몇 년 전부터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었기 때문에 6월 16일 블룸스 데이면 올라오던 행사 동영상을 보면서 (비록 아직까지 율리시즈를 단 한 장도 읽어본 적 없긴 해도) 언젠가는 한 번쯤 직접 저 현장에 있어보고 싶다 했었는데 운 좋게도 그 일이 실현될 줄이야. 율리시즈를 사랑하는 독자들이 앞에 나와 자신이 좋아하는 율리시즈의 구절을 연기까지 해가며 읽고, 점원들은 그 행사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두와 체리, 기네스 맥주와 샴페인을 나눠주고, 낭독 중간중간 재즈가 연주되던 현장에 있던 시간은 파리에서의 하일라이트가 아닐까 싶어. 그 시각 파리 한복판 그곳에 내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으면서도 정말 그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었거든.

 블룸스 데이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의 매니저쯤 되는 사람이 앞에 나와서 책방의 스토리를 간략하게 이야기해주는걸 들으며 책방의 역할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기도 했어.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작가 지망생들이 작가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자양분을 마련해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주었고, 그곳을 거쳐간 작가들과 그 작품들로 인해 결국 파리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아름다운 선순환을 이루었지. 엊그제 리브레리아Q 피드에서 비밀Q를 어느 기업의 독서모임에서 단체로 구독을 했다는 소식을 보고는 나도 무척 기쁘더라. 언니의 책방은 사람들이 좋은 독자로 잘 성장할 수 있는 자양분을 마련해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곳이니 분명 리브레리아Q를 통해 안목 있는 독자들이 많이 태어날 거고, 그 독자들로 인해 리브레리아Q 는 더 창의적이고 깊이 있는 행보를 보이는 책방으로 매번 거듭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 

 요즘 소설이 잘 안 읽힌다고? 늘 책을 읽기에 책 읽기에 대한 고민이 누구보다도 깊은게 언니란걸 잘 알아.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눈 앞에 놓인 현실을 생각하면 소설에 빠져 버리기 좋았던 적은 결코 없었던게 아닐지. 그냥 천천히 소설이 다시 언니에게로 찾아오는 날을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싶어. 소설에 다소 시니컬해서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던 나에게 소설의 즐거움을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언니였어.        


 103일간의 여행 속 한 달 간의 작은 여행이 벌써 끝나가. 너무 빨리 흘러버린 시간이 아쉽지만 이 한 달간 난 최선을 다해 낯설고 새롭고 궁금했던 것들 사이를 걸었던 거 같아. 뉴욕으로 돌아가면 이태리와 프랑스에서 받은 짧고 강렬한 경험을 여름 내내 곱씹고 정리하며 보내고 싶어. 다음 편지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서 쓸게. 그곳에선 여행 그 자체였던 지난 한 달보단 일상에 가까운 날들을 보내게 되겠지. 한 달간 거의 멈췄던 책도 읽으며 말이야. 한 주간도 건강히 잘 보내길.    


파리에서 한샘이가 한샘에게.

2022. 0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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