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샘이가 한샘에게
(정)한샘이 보내온 다섯 번째 편지
https://brunch.co.kr/@quartet/108
한샘에게
일단!
생일 축하해!! 선물은커녕 카드 한 장 보내지 못했는데 이렇게 이 편지라도 생일 당일에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야. 건강과 평온을 바란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빈말도 아니라는 걸 매 년 더 깊이 느끼기에 온 맘 다해 언니의 건강과 평온을 기도해.
한 달 간의 유럽 여행에서 돌아와 뉴욕에 구해놓은 집으로 들어왔고 들어오자마자 며칠 잠시 프린스턴이라는 곳을 갔다가 어제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어. 이제 며칠에 한 번씩 장소를 옮겨 다니던 일이 끝났고 여름이 끝나갈 무렵까지 한 곳에 정착할 수 있게 된 거지. 지금 들어와 있는 곳이 두 달 빌린 낯선 집임에도 불구하고 집이라고 구해놓은 곳으로 돌아오니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야. 이제야 지난 여행의 긴장과 피로가 풀리고 있는 것 같아. 오자마자 쌀을 사고 김치를 사고, 김을 사고 라면을 샀어. 이제부터는 그나마 익숙한 이 도시에서 ‘루틴’이라는 게 만들어지고 어쩌면 한국에서와 비슷한 일상이 시작되는 거겠지.
몇 년 전 우리가 함께 가곤 하던 한 책방에서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상영했었고 언니가 그 영화를 보러 갔던 일을 기억해. 그 후에 언니가 그 책도 빌려줬었고. 덕분에 알게 된 그 작품은 나에게도 인상 깊은 영화이자 소설로 남았어.
꿈은 저 멀리 있고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계속 자신의 상황을 합리화시켜가며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를 인생을 생존을 위한 일상의 굴레 속에 가둬두는 삶. 서로 같은 꿈을 꾸며 같은 곳을 향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가깝고도 먼 사이. 화가 났음에도 에이프릴이 무기력하게 집 안에서 격자창 너머를 가만히 바라만 보는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왜 저걸 박차고 나가지 못할까 하면서도 어쩌면 나도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머물러 있을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 에이프릴과 프랭크 그들은 레볼루셔너리(Revolutionary), 말 그대로 ‘혁명적인’ 길 위에 살면서도 결코 그 길을 박차고 나갈 수 없었으니 지독한 역설인 거지.
그 영화에 보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던 ‘존 기빙스'라는 인물이 나오잖아. 그가 말했던 “많은 사람들이 공허함 속에 살죠, 하지만 절망을 보려면 진짜 용기가 필요해요.”라는 대사. 그 대사는 살아가면서 자주 공허함을 느끼면서도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고, 절망이 두려워 용기를 내는 것조차 단념해버리고야 마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가 직접 거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들어.
<레볼루셔너리 로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얼마 전에 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카>와 어느 면에선 연결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언니도 이미 봤는지 모르겠네. 거의 세 시간짜리 영화라 보기 전에 너무 길겠다 싶었는데 세 시간을 영화에 푹 빠져 있었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에 나오는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지만 소설은 뼈대 정도에 불과했고 그 위에 훨씬 많은 살이 붙어 있어 여러 가지 관점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화겠더라고.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였던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를 목격해. 아내는 늘 그를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이었기에 가후쿠는 그 사실에 당연히 충격을 받아. 그러나 일상을 잃고 아내도 잃게 될까 두려웠던 그는 그 사건을 묵인한 채 상처를 혼자 품고만 있어. 어느 날 아내는 남편에게 퇴근 후 대화를 하자고 제안하는데 그만 아내가 그날 뇌출혈로 세상을 갑작스럽게 뜨는 바람에 가후쿠의 상처와 아픔은 치유되지 못한 채 남아있지. 그렇게 영화는 시작돼. (영화 시작부터 여기까지가 사십 분 이상 걸리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와.
“아무리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마음에 똑같이 들어가 보지 않으면 제대로 알 수가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애초에 그런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만 하면 노력한 만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말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피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나의 마음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다음은 어떤 일이 펼쳐지게 될까? 생에서 어느 순간엔 결국 용기를 내서 나를 제대로 바라봐야만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될 수 있는 날 비로소 두 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되겠지. 스스로를 투명하게 볼 수 있도록 웅크려 있는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으며 우리가 서로를 북돋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면 좋겠어.
이제 7월은 언니 생일로 시작해서 리브레리아 Q의 생일로 마무리되겠구나. 장맛비가 무지 많이 왔다고 들었는데 몸과 마음이 비에 젖은 솜 같아졌으면 어쩌나 걱정이 돼. 비록 덥지만 뽀송한 이곳의 기운을 좀 불어넣어 주고 싶네.
언젠가 우리 회사 근처에서 언니 생일날 저녁을 함께 먹으며 엄청 내밀한 이야기를 했던 게 갑자기 떠오르네. 언니도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때 그랬어 언니가. 이제 우리는 삶의 어떤 이야기든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된 거라고. 그 후로 꽤 긴 시간이 흘렀고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흔들릴지언정 여전히 마주 잡은 두 손을 놓지 않고 있어.
2022. 07. 02
뉴욕에서 한샘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