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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 Jul 17. 2022

다시 찾은 작은 기쁨 하나

한샘이 한샘에게

  한샘에게     


  책방 일로 바쁠 텐데 그 가운데 장마와 더위 속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 집을 떠난 5월 중순부터 삼십 도가 넘는 더위 속에 계속 있어서 난 이미 한참 전부터 한여름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는데 엊그제가 초복이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 이제야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거라니. 

  같은 기온이어도 늘 한국보다 햇살이 더 따갑게 느껴지는 곳이지만 여기 뉴욕은 아직까진 30도 언저리를 오가는 기온이었는데 다음 주부터는 내내 35도를 찍을 셈인가 봐.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다음 주엔 40도가 넘는 기온을 기록할 거라고 하는데 다음 주의 엄청난 더위는 상상하고 싶지가 않아. 얼마나 더울지 생각만으로도 벌써 지친다. 미국은 기온의 단위를 ℉로 쓰다 보니 35℃면 95℉ 정도인데 숫자가 크다 보니 왠지 더 덥게 느껴져. 곧 물이 펄펄 끓을 것처럼 말이지. 삼 년 전 여름에 뉴욕에 두어 달 와있을 때는 100℉, 그러니까 40℃를 넘는 날들이 많았었는데 이런 숫자를 보고 있으면 이젠 정말 기후 변화가 온몸으로 실감이 돼. 위기 상황이 아니라 이미 재앙이 시작된 게 아닐까 싶네. 여름을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앞으로도 계속 여름을 좋아한다고 마음 편히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여름이 좋다고 말하려다 보니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너무 많아져서 말이야.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다시 돌아온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어. 내가 언니에게 보냈던 첫 번째 편지에서 이젠 뉴욕을 사랑한다 말할 수 없을 거 같다고 했었는데 지난 한 달 간도 난 약간 시큰둥한 상태로 뉴욕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아. 뭐랄까? 권태기에 빠진 사람처럼 말이지. 여기 있는 동안은 그래도 재밌게 잘 지내보고 싶은데 마음이 영 내키지가 않으니 뭐가 문제일까 며칠 고민을 했었어.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아무래도 예전에 뉴욕에 한창 빠져있던 시절의 내 마음을 정답으로 정해두고 지금의 내 마음이 거기까지 닿지 않자 그걸 일종의 실패처럼 생각했던 것 같아. 그런 마음이 나의 과거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당연히 이곳이 예전만큼 좋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는데도 난 시간이 흐르면서 변할 수 있는 내 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지. 그래서 괴로웠던 거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난 일요일 오전에 혼자 센트럴 파크엘 갔었어. 센트럴 파크 중앙에는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베데스다 분수’라고 하는 분수가 있어. 그 분수 뒤로는 작은 호수가 있고, 그 호수에서는 노를 저을 수 있는 작은 배를 빌려 탈 수 있는데 분수대와 호수, 그리고 배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우러져서 무척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내는 곳이야. 그 풍경을 배경으로 밝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으며 각자 뉴욕에서의 아름다운 시간을 오래도록 간직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위에서 내려보다가 나도 모르게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어. 약간의 기쁨? 그리고 약간의 슬픔? 이 눈물의 의미는 실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신기하게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난 후 ‘어차피 모든 건 변할 수밖에 없으니 이런 나의 마음의 변화를 받아들이자’하는 쪽으로 마음이 자연스레 옮겨가는 걸 느꼈어.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건 꼭 뭔가가 잘못돼서 그런 게 아니라 어쩌면 물 흐르듯, 또 어쩌면 책의 페이지가 다음 장으로 넘어가듯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까. 그리고 나니 변덕스럽지만 다시 주변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야. 내가 좋아했던 곳들, 여전히 그대로 있는 곳들, 새로 생겨난 곳들, 그리고 원래부터 알고 있었으나 새롭게 내 눈에 들어오는 곳들...... 

 

  하루는 걷다 보니 예전부터 좋아했던 한 헌책방(Westsider Books) 앞을 지나게 되었어. 문을 열고 들어갈까 하다가 책방 앞에 세워둔 카트를 먼저 훑어보니 ‘샬롯 퍼킨스 길먼’의 평전이 보이는 거야 (『The life and work of Charlotte perkins gilman』, Anne J. Lane). 책방 앞에 아무렇게나 가져다 둔 헌책들 사이에서 책을 고르는 일은 늘 쉽지 않아서 잘 안 하는 편인데 거기에서 아는 이 이름을 발견하니 얼마나 반갑던지. 1994년에 출판된 건데 꽤 두껍고 사진도 들어있는 책이었어. 겉표지가 좀 찢어진 거 빼고는 상태가 괜찮아서 사 왔는데 길먼의 이야기를 풀기 위해 그의 아버지, 어머니 등 가족과 집안 이야기부터 쭉 펼쳐 보이는 책이더라고. 우리에게는 『허랜드』나 『엄마 실격』 등으로 최근에서야 알려지기 시작한 작가지만 미국에선 20세기 초반, 작가 중에서 대표적인 셀러브리티일 정도로 유명했었나 봐. 책이 꽤나 두꺼워서 (게다가 영어이기까지 하니) 언제 다 읽을지 모르겠지만 이미 마음은 책을 다 읽은 것처럼 뿌듯해. 그리고 다음 날은 또 다른 책방엘 갔어. 원래 있어야 할 책방이 아니라 그 자리에 다른 책방이 들어선 것 같아 찾아간 곳이었는데 그곳은 원래 Bookcourt라는 책방의 분점이었던 곳이었거든. 여러 어려움을 겪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기간에 문을 닫았는데 다행히도 그곳이 원래 갖고 있던 인테리어나 컨셉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로 뉴욕 책방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Strand에서 인수해서 운영하는 것 같았어. 어쨌든 새로 생긴 책방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지. 책방을 여기저기 살피다 신간 코너에 줌파 라히리의 번역가와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은 에세이집과 엘레나 페란테의 글쓰기에 관한 강연록이 나와 있었는 걸 발견했어. 그 책들의 책장을 몇 장 넘겨보고 있는데 정말 마음이 조금 두근거리더라고. 여전히 책방과 책들이 나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고민 없이 이 두 권의 책을 샀지만 아마 지금쯤 한국에서도 어느 좋은 번역가분이 열심히 번역을 하고 계시지는 않을지. 혹시 고급 정보를 알고 있다면 알려줘. 나는 원서 읽기를 계속 미뤄보고 있을게. 

   그렇게 책방에서 우연히 보물들을 발견하고 나니 예전에 내가 뉴욕을 왜 좋아했었는지 그 감각이 조금은 되살아 나는 거 같았어. 생각지도 못했던 작은 기쁨들을 길 위에서 얻을 수 있는 곳. 그런 기쁨을 내가 처음으로 인지하고 맛보았던 곳이 다름 아닌 바로 뉴욕이었기에 내가 이곳을 좀 더 특별하게 생각해왔던 게 아닐까 싶어. 그 기쁨이란 게 주로 책방을 통해 이루어진 적이 많았는데(책방을 발견하는 것도, 책을 발견하는 것도, 책방을 구경하는 것도, 책을 구경하는 것도 모두 기쁨) 무언가 심드렁하고 건조해졌던 마음에 다시 훈풍을 불어넣어 준 것도 결국은 또다시 책(방)이라니. 시시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한 이 굴레는 그래도 어쩐지 벗어나고 싶지가 않네. 다음 주는 무지 뜨거운 한 주가 될 것 같으니 거리를 걷는 일은 그만하고 아무래도 난 다시 책방의 굴레 속으로 자진해서 들어가 있어야 할 것 같아.


   시간이 어쩜 이렇게 잘 가는지. 벌써 7월도 절반을 넘겼네. 다음 주면 그리웠던 가족을 몇 년 만에 만나게 될 테니 언닌 지금 이 시간쯤엔 설레는 마음으로 분주하게 가구를 재배치하고 있는 건 아닐지. 모두 함께 좋은 시간 보내고 있길. 여기 소식은 또 뭔가가 눈에 띄는 대로 전해볼게.




2022.07.17

뉴욕에서 한샘이 한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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