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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림 Jun 15. 2022

잃어버린 시간은 많지 않을거라 생각해

04. 한샘이 한샘에게

(최)한샘이 보내온 네 번째 편지

 https://brunch.co.kr/@secretgarden/12


 화장실 변기 물탱크가 고장 나 급히 숙소를 옮겼다는 이야기를 읽으니 내가 겪은 피렌체의 어떤 밤이 떠올랐어. 좋아하는 도시였기에 아이들에게도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계획한 일정이었는데,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부터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해 불안한 예감이 들었지. 게다가 아이 하나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걷지 못하고 숙소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며 카페에 앉아 있어야 했고 갑자기 비가 부슬부슬 오더니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어. 관광이고 뭐고 따뜻하게 해 주고 얼른 재워야겠다는 생각에 저녁도 급히 대충 먹고 숙소에 들어갔는데 11월이 되어야 중앙난방을 트는지라 방에 온기가 하나도 없어 정말이지 너무 추웠어. 대리석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어찌나 야속하던지. 난로라도 얻을 수 있는지 물어봤지만 키를 넘겨준 직원과는 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고, 추위에 덜덜 떠는 아이들에게 이불을 모두 둘러준 후 이 밤만 어서 넘기자 했는데 깜빡 잠이 들었다가 이상한 소리에 눈을 뜨니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폭우로 바뀌어 있고 바닥이 벽과 천장에서 샌 빗물로 흥건해져 있지 뭐야. 아이까지 넷이 한 방을 쓰기 위해 구한 한인 민박이었는데 예약 사이트에 적힌 전화번호는 소통이 불가능하던 그 유일한 직원의 번호였어. 어찌어찌 대표 전화를 대라고 난리를 친 후에야 한국인 사장이 연결되었지만, 자신은 다른 도시에 있다고 하며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고 전화가 연결되길 기다리며 바닥에 흥건한 물을 피해 한 침대에 옹기종기 모여 올라가 있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캄캄한 밤에 숙소를 나왔지. 그리고는 기차역에 있던 카페에서 따뜻한 차와 커피로 잠시 위안을 얻고 밤기차로 바로 로마로 돌아왔어. 환불받기까지의 과정은, 아이고 말도 마. 그저 큰 방을 저렴한 가격에 얻겠다고 잘 알아보지 않고 숙소를 구한 나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던, 피렌체에 연관된 유일하게 끔찍한 기억이야. 그러니 너의 안시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서 참 다행이야.


그날의 흐렸던 피렌체


 콩브레는 두 도시를 섞어 만든 가상의 마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름에 아예 콩브레가 들어있구나.

그런데 내가 오늘 뭘 먹었는지 알아? 바로 보리수 열매야. 아주 빨갛게 잘 익은 보리수를 나무에서 바로 똑, 똑 따서 먹었어. 오늘 수업하러 간 선생님 작업실에 큰 보리수나무가 있는데, 잘 익었다고 먹어보게 해 주셨거든. 이런 장면은 좀 비현실적으로 다가와. 사람마다 익숙하지 않은 행위나 유독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의 영역이 있을텐데, 내게는 무언가를 '수확' 하는 행위가 그 영역에 들어있는 것 같아. 게다가 내가 아무런 정성을 들이지 않은, 거저 얻게 되는 수확물이라면 일종의 죄책감 비슷한 감정도 느껴질 때가 있어. 하지만 오늘은 그저 감사히 그 낯선 경험을 받아들였어. 다른 것도 아니고 보리수였으니까.

달콤하면서도 새콤하고 약간의 떫은맛과 가루분이 느껴지는 독특한 끝 맛을 느끼며, 마르셀이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마들렌을 찍어먹었다던 보리수 차는 어떤 맛일까 생각해보았어.


 어느 도시를 가든 너만의 여행 테마를 세우는 능력을 가진 네가 항상 신기하고 놀라웠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가만가만 움직이는 것 같은데도 풍부한 이야기 속을 옮겨 다니는 네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이번에 네가 거쳐간 도시들에서 만나는 이름들, 장소들, 시간들도 얼마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가득한지. 문학을 따라가는 여정은 네가 얼마나 문학을, 소설을 사랑하는지 보여주는 것 같아.

 나 역시 잠을 잊은 밤이면 그저 소설 속으로 파고드는 긴 세월이 있었는데, 요즘의 나는 소설을 잘 읽지 못하고 있어. 책을 펼치기만 하면 내가 모르는 세계를 보여주던 소설들을 만나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경험하지 못한 일, 가보지 못한 곳, 만나보지 못한 인물들에게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면서도 기꺼이 그 이야기 속으로 모든 감각을 던져 넣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한데도 나는 왜 소설을 읽지 못하는 걸까.



 미사일이 발사되고, 리터당 기름값이 2000원을 넘어서고, 방화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사람들은 잔뜩 화가 나고, 집값이 올라도 욕을 하고 떨어져도 욕을 하지. 기본적인 이동권을 위해 투쟁하던 사람들이 멈춰있던 기간에도 불편함을 각인시키던 방송이 있었음을 알리는 글과, 이동하지 않아도 되는 이의 불필요한 이동을 미화하는 언론 기사를 나란히 접해. 이런 사회라서 소설에 빠져들지 못하는 걸까.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인데, 억지로 이유를 찾으려 하지 않고 다시 소설이 내게 다가오기를 기다려보려고 해. 너를 기다리며 1권에서 영원히 멈춰 있을 것 같았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어볼까도 생각해봤는데, 역시 자신 없는 일이야. 당분간은 프덕인 네가 전해주는 이야기로 만족하는 게 좋겠어.



 

여기는 이번 주 내내 비가 내리고 있어.

비가 오는 날 외출하는 것도 싫어하고 저기압에 움츠러들 몸을 미리 걱정하는 사람이지만, 이번 비에는 절대로 그런 부정적인 마음을 갖지 않기로 다짐했어. 다짐한 김에 오늘은 잠시 비 아래 걷기도 했는데, 전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어. 세상에. 내가 비 오는 날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걷다니.

날씨가 얼마나 신기한 것인지, 날씨가 자연뿐 아니라 사람에게 주는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 날씨로 인해 생활이 바뀌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설명해 놓은 책《날씨의 맛》중 비에 대한 부분이 저절로 떠올랐어.


그로부터 조금 후엔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비를 찬양할 차례다. 미국의 초월주의 애호가들은 그가 느끼는 기쁨의 범위가 확장된 것에 또 한 번 감동했다. 피에르 아도는 그의 글에서 소로가 빗방울 속에서 "무한한 만큼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자비심을 인지했다"고 썼다. 소로는 "그것이 식물에 좋다면 나에게도 좋은 것이다" 라며 《월든 Walden》에 적고 있다. 비는 그에게 세상 전체에 깊이 침잠하는 느낌을, 스토아 철학자들의 것이었던, 자연을 수용하는 기쁨을 되찾는 느낌을 주었다.

-알랭 코르뱅 (역사학자)


 찬양까지는 힘들다 해도 그래, 그것이 무엇이든 식물에 좋다면 우리에게도 좋은 것이지. 아마 너는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너는 일상을 충분히 느끼는 아이라고 생각해왔어. 네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올리는 꽃 사진을 얼마나 감탄하면서 보아 왔는지 모를거야. 너처럼 매일의 변화를, 특히 자연의 변화를 감탄하며 지켜보고 기록할 줄 아는 사람은 후에 되돌아봐도 잃어버린 시간이 많다고 느끼지는 않을 거라고, 난 그렇게 생각해.


  그나저나 나는 유부와 대파가 잔뜩 든 달콤하고 매콤한 떡볶이에 맥주를 곁들이는 상상을 하니 가슴이 너무 뛰어서 너의 출장이 이쯤에서 끝났으면 좋겠다는 발칙한 생각을 잠시 해 보았네. 갑자기 배가 고파. 뭐라도 먹어야겠다. 다음 이야기 기다릴게.


비가 많이 오는 이곳에서, 한샘이가 한샘에게.

2022.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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