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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림 Jul 16. 2022

내가 보는 것은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이야

어쩌면 마지막 편지

안녕, 한샘.


이른 장마가 지나가고 이제 더위가 계속되려나 . 나는 여전히 선풍기만으로 버티 여름을 보내고 있어. 에어컨 없이 사는 삶이 오래 되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더우면 덥나 보다 . 견딜만한 사람들이 견디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면 한정된 자원을 얼마든지 나누어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동네에 아주 큰 창고형 마트가 오픈했어. 마침 나는 지난 생일에 그곳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을 선물 받았고 말야. 필요한 생필품이나 사자 싶어 갔다가 깜짝 놀랐지 뭐야. 아무리 식품을 판매하는 곳이라지만 매장 전체가 냉장고 같았어. 왜 그렇게까지 춥게 해 놓은 걸까. 지구가 겪고 있는 이런 저런 일들을 생각하면 웃다가도 울컥하곤 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하지만 물건을 이고지고 살아온 내가 누굴 탓하겠어. 얼마 전부터 이것저것을 비우고 덜어내고 있어. 어떤 것은 내놓자마자  주인을 찾아 가고, 어떤 것은 지겹게  팔리고 그래.

요즘 다시 책을 많이 읽고 있어. 시도 읽고 강의도 들어.

 책보다는 있던 책들을 새로 읽거나 다시 읽는데언제 사 두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좋은 책들이 얼마나 많은지, 지난 20 동안 책만  건가 어.

도통 쓰지는 못하고 있어. 3년 전에도 마감을 앞두고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되면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었는데 또 이러다니, 삶이 계속 쳇바퀴를 도는 것 같아 우습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

써야 하는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건 정말 큰 스트레스이자 미안한 일인데 시간을 더 얻어서 그건 참 다행이다 싶어.

매일 맥주를 마셔. 한동안 돈이 없어 못 마시던 술을 선물도 많이 받고, 상품권도 많이 받아서 맥주가 떨어질 겨를이 없어. 아, 밀가루 음식도. 이러면 안 되는 거겠지? 이제 정말 회복이 느려지는 나이가 되었으니 말야.

매일 식물을 돌봐. 새 잎을 찾아내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 지 몰라. 바질은 내가 주로 키우는 건 아니지만 나도 관심을 가지고 돌보고 있어. 신선한 바질향이 정말 좋아.

일찍 자려고 하고 있어. 새벽에 항상 같은 시간에 눈이 떠지는데,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3시간 정도가 될까 말까 하니 몸이 너무 힘들어서 잠이 오든 안 오든 일찍 누워서 눈을 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 그렇게 두세 시간이 갈 때도 있지만, 운이 좋으면 빨리 잠들기도 하거든.






오늘 너의 침묵은 물에 빠진 것들이 사는 연못이야
나는 그것들을 건져 올려 물 뚝뚝 흘리며 태양 속으로 들고
      가서 보고 싶어.
그곳에서 내가 보는 것은 나 자신의 얼굴이 아닌, 다른
     얼굴들,
심지어 다른 나이의 네 얼굴이야.
거기서 잃은 것은 무엇이든 우리 두 사람에게 필요해ㅡ
금으로 된 낡은 손목시계, 물 자국 얼룩이 진 열병 진요
      기록부,
열쇠 하나...... 밑바닥 고운 흙과 자갈조차
반짝 인정받을 자격이 있어. 나는 두려워 이 침묵이,
이 표현할 수 없는 삶이. 나는 기다리는 중이야
이 덮개 씌운 물을 한 번은 부드러이 열어 줄,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름 부를 수 있게 너를 위해,
타인을 위해, 심지어 나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보여 줄 바람을.

에이드리언 리치




내가 걷고 있는 진창길을 너는 알고 있으니 우리의 편지는 여기에서 멈춰도 된다고 했지만 너의 새 편지가 오기 전에 그냥 이렇게 몇 줄이라도 적어보고 싶었어.

너와의 긴 대화를, 그날의 시간을 물론 기억하고 있어. 그것도 매우 생생하게.

넘어가면 큰일 날 것 같은 선 앞에 딱 멈추어 서서 발 밑만 내려다보는 날이 이어지지만,

여전히 마주 잡은 손은 혹여 내가 조금 심하게 흔들리다 부러진다 해도 놓칠 손이 아니란 걸 알기에 조금은 위안이 돼.

인생이 보조바퀴 달린 자전거 같았으면 좋겠다

예상치 못한 걸림돌을 만나 덜컹대며 손을 놓쳐도 넘어지지 않도록.

잘 지내, 한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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