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의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
주인공 버나뎃은 젊은 나이에 맥아더상을 받고 천재라 불린 뛰어난 건축가였지만 건축가로서 좌절하는 사건으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고 활동하던 LA를 떠나 남편과 시애틀에 정착한다. 영화 초반에는 본인의 선택으로 보였는데, 보다 보면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음이 보인다. 당시 남편이 마이크로소프트에 영입되어 회사에 매인 삶을 살아야 했고, 두 번의 유산 끝에 낳은 아이 (비)는 몸이 약해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이가 이겨내는 동안 극진하게 돌보았을 버나뎃의 시간이 보인다. 그렇게, 약한 아이를 보살피며 지내는 동안 건축가로서의 자아는 잃어가고, 버나뎃은 친구도 지인도 없는 낯선 도시에서 자신이 그어놓은 선 안에서만 안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런 버나뎃인지라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 델리의 가상 도우미를 고용해 여러 업무를 보는데 (약 처방, 온라인 쇼핑 등) 그 도우미가 사실은 러시아의 폭력조직이었다는 것. 그러니까 보이스피싱 같은 건데 이 다음부터가 대환장이다. 모르고 그런 거니 해결하면 되는 건데, 이 ‘모르고’에 사람들이 집착하기 시작한다. 소통도 안 하고 사람들도 만나지 않아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평범하지 않은’, ‘남들과 다른’ 버나뎃은 이제 치료의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일에만 파묻혀있던 남편놈은 비서 (딸과 같은 학교 학생의 엄마) 소개로 상담사를 만나고, 결국 이 셋은 버나뎃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한다. 그것도 원래 세 가족이 함께 하기로 약속되어있던 남극 여행기간에. 그리고 버나뎃은 그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홀로 남극으로 향한다.
일 때문에 시애틀에 온 오랜 친구를 만나 쉴 틈 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는 버나뎃은 흥분해 있었고, 살아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큰 충격을 받았을 때 맞서 싸워 이겨내지 않고 도망쳤다고 해서 비난받아야 하는 것일까.
남편이 상담사와 비서와 함께 버나뎃을 몰아붙이는 장면은 숨이 조여왔다. 버나뎃에게는 모든 것이 버거웠다는 걸 왜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타인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몰아붙이지. 할 말을 찾지 못해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까지 변명을 하는 버나뎃의 안절부절못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내가 내어준 자리보다 빠른 속도로, 다 아는 듯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모두가 반갑고 감사히 맞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그런 것이 두렵다. 그런 사람은 되려 좀 멀리하고 싶어 진다. 호감과 호의를 표현하는 것과 내가 보이지 않은 면까지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런 사람의 마음을 마주하면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버나뎃은 남극으로 도망해 비로소 자신을 마주하고 예전의 열정을 되찾게 되었다. 사람을 피하고 집안에 머물게 된 것이 창작의 욕구를 무시하고 발산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기인했음을 갑자기 깨닫고 반성하게 된 남편과, 누구보다도 엄마를 이해하고 엄마 본연의 모습을 사랑하는 딸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 일만 남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버나뎃과 다를 것이다. 대부분은 남극에 가지도 못할 테고, 대부분의 여성에게는 자신을 변호해 줄 비 같은 딸이 없다.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며 코너로 몰던 거실의 장면이 머리와 가슴에 박혀 이혼을 택할 수도 있겠다.
버나뎃이 가졌던 명성과 경제적 여유 같은 것에는 전혀 교집합이 없지만 어려움을 겪는 버나뎃의 모습에는 감정이입이 깊게 되었다. 연기도 너무 훌륭했고.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하다 보니 무례함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는 상황들이 생긴다. 비대면 모임과 온라인 주문에서는 좀 더 쉽게 무례함의 공격을 받는다. 버나뎃처럼 낯선 사람들과 섞이는 걸 어려워하는 성격에, 화도 많은 사람이다 보니 이런 일이 많은 날이면 회복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십여 년 전에 자주 가던 카페 사장님은 항상 아이패드에 유선 이어폰으로 무언가를 보고 계시다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눈인사를 하신 후 주문을 받을 때만 귀에서 이어폰을 빼시곤 했는데, 이제야 알겠다. 그건 사장님이 앞으로 닥쳐올 미지의 무례함에 방어하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남극에는 갈 수 없으니 어떻게든 여기에서 나를 지키며 살아내야 한다. 어떤 날은 그 생각만으로도 고단해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