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자우너 《H마트에서 울다》
"엄마는 내게 직접 요리하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한국인들은 똑 떨어지는 계량법 대신 “참기름은 엄마가 해주는 음식맛이 날 때까지 넣어라” 같은 아리송한 말로 설명하길 좋아한다) 내가 완벽한 한국인 식성을 갖도록 나를 키웠다. 말하자면 나도 훌륭한 음식 앞에서 경건해지고, 먹는 행위에서 정서적 의미를 찾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음식 하나하나에 대한 선호가 분명했다. 김치는 알맞게 익어서 적당히 새콤한 맛이 나야 했고, 삼겹살은 바짝 구운 것이어야 했으며, 찌개나 전골은 입안이 델 정도로 뜨겁지 않으면 차라리 안 먹느니만 못했다. 한 주 동안 먹을 음식을 미리 만들어둔다는 생각은 말도 안 되었고, 우리는 그날그날 당기는 음식을 바로바로 만들어 먹었다. 만약 3주 동안 김치찌개 말고는 다른 음식이 생각나지 않으면, 딴 음식이 생각날 때까지 허구한 날 김치찌개만 만들어 먹었다. 우리는 철철이 제철 음식을 해 먹었고, 꼬박꼬박 명절 음식을 챙겨 먹었다."
제철 음식은 미국의 제철 음식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며, 명절 음식은 신경 써야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저자의 어머니는 한인 사회 안에서 살지 않았다. 대부분이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문화 속에서 아이는 기를 쓰고 한글학교에 보냈지만 종교는 가지지 않았다. 한국인 이민자 가정이 아니었고 미국인과의 결혼생활이었다. 엄마가 한인과 교류하지 않았기에 저자 역시 한국어를 듣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엄마와의 단단한 유대감은 완벽하게 한국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단절되었던 시기를 지나 다시 어린 시절의 견고한 신뢰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엄마를 찾아온 병과 6개월의 시간. 그 상실을 감싸고 있는 한국 음식과 한국 여행의 추억을 읽으며 속수무책으로 울었다.
나무. 나의 조카를 어찌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한국인 엄마와 이탈리아인 아빠.
언니는 결혼을 위해 이주한 케이스가 아니고 본인 스스로 이탈리아 문화가 더 편할 때에 아이를 낳았기에 아이에게 한국어를 사용하려면 본인이 자각하고 애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건, 아이를 낳고 바로 다시 일을 시작한 언니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무는 어릴 때 두 언어를 받아들이기 혼란스러운 상황을 겪어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조금 커서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나무가 어색한 발음으로 새로운 단어를 말해오면 참 반갑다. 저자는 미국인으로 자랐지만 한해 걸러 한 번씩 여름이면 6주간 서울에서 할머니와 이모들, 어른 여성들의 '한국식' 사랑을 듬뿍 받았다. 이모들과 사촌 오빠와 함께 보낸 시간이 얼마나 선명했는지, 읽는 우리도 그 장면이 훤히 그려지게끔 글로 적어내었다. 우리 나무도 그럴까. 나와 배추, 약콩이가 나무에게 그런 시간을 선물할 수 있을까. 코로나가 있기 이전에 우리 모두 이제 나무가 조금 컸으니 매년 한국에 와서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 계획하고 즐거워했었다. 내가 이모로써 언젠가 자신에 대해 많은 질문을 떠올릴 조카에게 주고 싶던 시간들이 책 안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흘려버린 날들이 더욱 아쉬웠지만, 다가올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 지 다시 그려볼 수 있었다.
내가 모르는 한 사람의 역사를 깊게 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 잘 쓰인 문장으로 담아낸 한 사람의 역사 속에는 나의 이야기도 있다. 타인의 문장을 빌려 내 삶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