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L Nov 11. 2015

글램 록이 쏘아올린 발레 소년

빌리 엘리어트,  2000

소년이 레코드를 꺼내 플레이어에 건다. 어리숙한 손놀림 때문에 바늘 촉이 엉뚱한 곡에 가닿자, 소년은 조심스레 바늘을 들어 트랙 위에 다시 얹는다. 어쿠스틱한 기타음과 동시에 흘러나오는 잔잔한 보컬. '나는 12살에 춤을 추었죠. 나는 12살에 춤을 추었죠...' 칙칙한 녹색 벽지 위에 노란 자막이 대비되고, 드럼 비트에 탄력을 받은 소년이 점점 더 신나게 튀어 오른다. 국화처럼 보였던 벽지 무늬가 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 스타를 향해 터뜨리는 카메라 플래시 같다. 느릿한 슬로우 모션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흥겨운 리듬. 포크 록에서 글램 록으로 넘어가는 지점에 티렉스가 내놓은 역사적인 앨범 [Electric Warrior]에 수록된 'Cosmic Dancer'다. 원래는 윤회와 사후 세계를 믿었던 리드 보컬 마크 볼란의 상상력이 담긴 곡이었지만, 춤에 재능을 가진 또래의 소년을 위한 배경음악으로 깔리니 그것도 나쁘지 않다. 


1984년 그리고 영국. 이 시간과 공간이 영화 <빌리 엘리어트 Billy Elliot>의 사연이 놓인 배경이 된다. 마가렛 대처의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에 반대하며 강력한 연대의식을 앞세워 자신의 권리를 지켜내려 했던 노조들. 철의 여인과 강철 같은 노동자들이 충돌하면서 영국 도처에 구조 조정과 실업이라는 거센 칼바람을 일으키던 험악한 시대다. 그러나 차가운 바람은 거기에만 머물지 않았다. 정부 대 노동자라는 사회적인 관계 말고도, 노동자 개개인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또 다른 관계, 또 다른 차원의 갈등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가족의 생계와 미래를 담보로. 석탄 검댕이와 땀으로 얼룩진 탄광 마을을 누비는 날렵한 발레 소년, 빌리를 그리는 이 영화의 음악은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 음악이 저항 정신을 대표하는 록이라는 점에서, 또 그 록 음악이 다름 아닌 글램 록이라는 점에서 한번 더. 


70년대 전반 미국이 아닌 영국을 휩쓸었던 글램 록은 초기 로큰롤의 쉬운 리듬과 키치적인 사운드 그리고 절로 엉덩이가 실룩거리게 만드는 경쾌한 댄스 비트로 대중의 사랑을 차지할 만했다. 그러나 찻잔 속 폭풍처럼 글램 록이 다른 나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그레이트 브리튼 섬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성 정체성을 의심케 하는 글램 로커들의 짙은 화장과 의상 때문이었다(때때로 그것은 브리티쉬 인베이전을 또다시 걱정하던 미국 음악계가 공격하기 좋은 빌미가 됐다). 그러나 사이키델릭에서 글램 록으로 이어진 브리티시 록은 브릿팝의 꽃을 피웠고, 그들의 현란한 의상과 분방한 사상은 펑크 록으로 다시 이어져 섹스 피스톨즈와 더 클래시 같은 뮤지션들에게 힘을 실어준다. 그 정점에 있던 밴드가 <빌리 엘리어트>의 사운드트랙에 다섯 개의 트랙을 선사한 티렉스(T-Rex). 1977년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던 마크 볼란이 자동차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기 전까지(그리고 그 이후로도) 영국인들이 사랑했던 밴드 중 하나다. 물론 이 영화의 배경인 1980년대 중반과 그들의 활동 시기는 시간적인 갭이 있지만, 마크 볼란의 사후 티렉스의 인기가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빌리의 형이 애지중지 모아놓은 레코드 컬렉션에서 그들의 앨범을 발견할 수 있다. 


<빌리 엘리어트>의 사운드트랙 ㅣ Polydor Records(2000)


<빌리 엘리어트>에 삽입된 티렉스의 노래는 하나같이 글램 록의 정수로 꼽히는 명곡들. 오프닝 타이틀을 장식하는 'Cosmic Dancer'는 글램 록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다룬 토드 헤인즈의 걸작 <벨벳 언더그라운드>에서 이미 한 차례 선보였던 곡. 이 노래가 수록된 티렉스의 앨범은 영국 차트 1위를 석권하며 마크 볼란이 이끄는 티렉스와 글램 록의 존재를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시킨다. 이동 도서관 버스에서 빌리가 몰래 발레책을 가지고 나올 때 흐르던 곡 역시 같은 앨범에 수록된 'Get It On'. 노래 제목처럼 발레에 점점 더 '열을 올리는' 소년의 호기심이 경쾌한 리듬의 블루스, 부기(Boogie)로 펼쳐진다. 마크 볼란에게 '볼란 부기(Bolan Boogie)'라는 애칭을 붙여준 팬들에게 화답하듯 볼란은 그의 마지막 앨범에 'I Love To Boogie'를 선사했고, 이 곡은 빌리의 재능을 눈여겨 본 윌킨슨 선생의 개인 교습용 춤곡으로 등장한다. 춤에 대한 사랑과 저항의 록 이미지를 중첩시킨 절묘한 선곡. 발레를 계집애들이나 추는 춤이라며 완고하게 버티는 아버지와 빌리가 충돌하는 순간에 흐르는 'Children Of Revolution'에서 춤과 록으로 중첩된 저항의 이미지는 극에 달한다. 선입견과 편견을 깨부수려는 소년의 몸짓. 비록 현실의 벽에 부딪힐지언정 그것은 빌리에게 도전이자 혁명인 셈이다.


티렉스로 대표되는 글램 록의 뒤를 잇는 펑크 록 밴드의 활약도 자못 흥미롭다. 발레 학교 입학을 위한 오디션 당일. 시위대의 선봉에 선 토니가 경찰에게 좇기는 긴박한 순간을 그리는 더 클래시(The Clash)의 'London Calling'엔 런던으로 떠나지 못하는 빌리의 안타까움과 좇기는 형을 보고 안절부절못하는 동생의 마음이 묵시록에 가까운 노랫말로 교차한다.  


런던이 저멀리 마을에 고한다

이제 전쟁이 선포되고 전투가 시작된다 

런던이 지하 세계에 고한다

소년 소녀들아 숨지 말고 나와라

런던이 고한다, 이제 우리에게 바라지 마라

가짜 비틀즈 마니아는 죽었다

런던이 고한다, 우리에게 평화는 없다

휘두르는 경찰봉만 빼고는


시위대를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는 대처 수상의 말이 오버랩되는 가운데 모든 것이 경직된 이 아비규환 같은 세상은 악몽에 가깝다. 폴 웰러 Paul Weller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펑크 록 밴드 더 잼(The Jam)의 'Town Called Malice'가 등장하는 대목은 바로 이 지점. <빌리 엘리어트>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 장면에서 화장실 벽을 박차고 나간 빌리는 거리에서 분노의 탭 댄스를 춘다. 춤에 대한 소년의 애정과 열정과 감정이 한 마디 대사 없이 오로지 몸으로 표현될 때 우리는 짜릿한 전율에 휩싸인다. 뒤늦게 빌리의 춤을 본 아버지의 마음도 마찬가지였을 터다. 천재일지도 모르는 아들의 재능을 깨닫은 아버지가 형과 함께 깊은 탄광으로 향하는 엘레베이터에 다시 몸을 싣을 때 우리의 가슴은 먹먹해진다.    


눈길을 끄는 것은 또 다른 펑크 록 밴드 더 스타일 카운실(The Style Council)로 이어지는 폴 웰러의 존재. 더 잼의 해체 후 다시 폴 웰러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스타일 카운실은 1984년 대처 수상이 내놓은 탄광 폐쇄 정책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파업이 일어나자 싱글 [Soul Deep]을 내놓으며 노동자들의 입장을 지지했다. 또한 그 이듬해 발표한 두 번째 앨범 [Our Favorite Shop]은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노랫말에 담아내면서 폴 웰러의 스타일 카운실은 록 스피릿을 대표하는 위대한 뮤지션으로 자리잡는다. 영화에는 삽입되지 않았지만, 왠일인지 사운드트랙엔 수록된 스타일 카운실의 두 곡 'Shout To The Top'과 'Walls Come Tumbling Down'은 바로 이 앨범에 각각 실려있던 곡들. 덕분에 글램 록에서 펑크 록으로 넘어가는 7-80년대 브리티시 록의 계보가 사회와 가족 그리고 여성성과 남성성이 충돌하는 시대의 사운드트랙으로 얼추 짜맞춰진다. 그리고 마지막 퍼즐 조각은 다시 티렉스. 1970년 티라노사우르스 렉스에서 티렉스로 밴드 명을 바꾼 뒤 발표한 싱글에 수록됐던 'Ride A White Swan'은 대미를 장식하는 매슈 본의 [백조의 호수]를 암시하는 교묘한 선곡인 셈. 글램 록이 쏘아 올린 발레 소년이 백조가 되어 공중으로 힘차게 도약할 때 그들의 노래는 이제 진짜 스포트라이트처럼, 폭죽처럼 환하게 빛난다.  




01  [04:28]  Cosmic Dancer_ T-Rex

02  [04:24]  Boys Play Football: Dialogue by Gary Lewis & Jamie Bell

03  [04:24]  Get It On: T-Rex 

04  [00:39]  Mother's Letter: Dialogue by Julie Walters & Jamie Bell

05  [03:27]  I Believe_ Stephen Gately

06  [02:53]  Town Called Mallice_ The Jam 

07  [00:50]  The Sun Will Come Out: Dialogue by Julie, Jamie & Nicola

08  [02:11]  I Love To Boogie_ T-Rex 

09  [04:14]  Burning Up_ Eagle Eye Cherry

10  [01:11]  Royal Ballet School: Dialogue by Julie Walters & Jamie Bell

11  [03:20]  London Calling_ The Clash

12  [04:45]  Children of the Revolution_ T-Rex 

13  [00:33]  Audition Panel: Dialogue Barbara Hunt & Jamie Bell

14  [04:13]  Shout To The Top_ The Style Council

15  [03:21]  Walls Come Tumbling Down_ The Style Council

16  [02:14]  Ride A White Swan_ T-Rex

17  [04:27]  Cosmic Dancer (reprise)_ T-Rex


매거진의 이전글 모리꼬네 사운드의 정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