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
해외여행이 까다로웠던 80년대 중반. 외국에 일하러 갔다가 아예 그곳에 보금자리를 튼 친척이 오랜만에 방문해 맛이나 보라며 건넨 쿠키의 희한한 풍미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 과자가 담긴 양철통에 그려져 있던 오밀조밀한 일러스트도. 여태껏 남아있다면 꽤 근사한 빈티지 소품이 되었을 그 쿠키 상자의 화사한 이미지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을 보면서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내 나라의 것이 아니지만 내 인생의 소소한 기억으로 남은 이국의 낯선 물품도 결국엔 내 추억의 일부가 될 수 있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추억은 장소보다 시간에 기대고, 흐르는 세월에 모종의 인상은 하나의 심상으로 굳는다. 그렇기에 웨스 앤더슨 Wes Anderson 감독이 시간적인(그것도 아주 구체적인) 정보를 던져주고 주브로브카라는 가상의 나라에 세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향수를 자극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현재로부터 1985년, 다시 1968년 그리고 1932년으로 순식간에 도약하는 깜찍한 삼단뛰기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은 말 그대로 그림처럼 예쁜 화면에 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던 로비 보이 제로가 어떻게 호텔을 물려받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추적하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재미로 느껴질 정도다. 호텔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마저도 앙증맞기 짝이 없는 화면 아래 슬그머니 자리 잡은 음악도 이야기보다 이미지에 더 역성을 든다. 그런데 거기에서 기존의 웨스 앤더슨 표 영화와 확연히 다른 변화 하나가 감지된다. 대폭적으로 늘어난 스코어의 비중이다. 그리고 이것은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Alexandre Desplat가 그의 영화에 음악가로 이름을 올리면서 서서히 조짐을 보였던 변화이기도 하다.
데스플라와 웨스 앤더슨이 함께 작업한 영화는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와 <문라이즈 킹덤>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그전까지 주로 작곡가 마크 마더스바우 Mark Motherbaugh와 함께 했던 앤더슨 감독은 그의 스코어에 번번이 여러 장르에서 발췌한 삽입곡을 뒤섞어 사운드트랙을 꾸몄다. 그리고 자신의 독특한 영화들과 매번 짝을 지운 영화음악 앨범들은 데뷔작 <바틀 로켓>부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까지 이제 여덟 장에 이르른다. 그러니까 앤더슨 감독은 데뷔작부터 한차례도 빠짐없이 영화를 개봉할 때마다 그 사운드트랙 앨범을 꼬박꼬박 내놓은 셈이다. 대부분 감독들의 필모그래피와 디스코그래피가 일치하지 않는 가운데 앤더슨 감독의 영화와 사운드트랙이 보여주는 이런 놀라운 대칭은 그가 영화음악에도 얼마나 깊은 애정을 품었을지 짐작게 해주는 단서 아닌 단서다.
웨스 앤더슨에 대한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말 역시 이런 짐작을 뒷받침한다. "몇몇 감독들은 영화에 음악을 입힐 때에서야 겨우 관심을 가집니다. 그것이 영화 제작의 가장 마지막 단계이고, 또 가장 지쳐있는 상태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작곡가가 만들어 온 음악이 영화에 불쑥 끼어들거나 이야기를 망칠까 봐 노심초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앤더슨 감독은 다릅니다. 그는 함께 즐기고 싶어 하거든요. 자신이 꿈꿔왔던 세계를 어떤 색감과 에너지로 채우고 나서, 그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캔버스 같은 영화를 제게 가져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마무리할지 같이 결정하죠.'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작곡가를 찾아오기 전에 웨스 앤더슨의 영화엔 어떤 틀이나 색이 이미 정해져 있고, 음악가의 작업은 그 틀 안과 바탕색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의 스코어를 데스플라에게 처음 맡겼을 때 앤더슨 감독은 이 영화가 스톱 모션으로 이루어진 인형극이기에 그 영화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규모 역시 인형극처럼 작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데스플라는 오케스트라 세션을 대폭 줄이는 것도 모자라 연주자들의 악기까지 더욱 작고 앙증맞은 음색을 내는 악기로 교체해 감독을 웃음 짓게 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역시 예외가 아니다. 30년대 (동)유럽 분위기라는 틀 안에서 치터와 침발롬, 그레고리안 성가, 알파인 호른이 영화에 필요한 음색으로 물망에 올랐고, 데스플라는 이 모든 악기를 활용해 스코어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데스플라가 자신의 음악적인 상상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영화 내내 거의 음악이 끊이지 않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멜로디와 리듬은 대부분 그의 솜씨로 이루어졌으므로. 그치지 않는 이 음악의 향연은 앤더슨 영화의 어떤 특징이기도 한데, 마크 마더스바우의 스코어와 선곡을 버무린 초기작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알렉상드르 데스플라가 등장하면서 영화의 전면에 있던 삽입곡들이 뒤로 물러난 대신 스코어가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는 건 역시 가장 주목할만한 변화다. 또한 마더스바우에서 데스플라로 작곡가가 바뀌었다고 해도 왠지 비슷한 인상을 풍기는 음악의 색깔이랄까, 쓰임새는 무엇보다 웨스 앤더슨의 감각이 최상위에 위치하기 때문일 터다.
그런 그의 영화 스타일을 모순 형용에 가까운 몇 가지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유쾌한 장엄함, 여유로운 치밀함, 귀여운 무미건조함 그리고 안정적인 긴장감 같은 말로. 시각적인 부분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그렇다. 특히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부터 손가락으로 현을 튕기는 발현악기에 대한 웨스 앤더슨의 남다른 애정은 소품 같은 바로크 음악과 어울려 영화에 미묘한 긴장감을 더하곤 했다. 일렉과 포크 기타의 음색이 돋보이는 록과 발라드, 낭창낭창한 하프와 카랑카랑한 시타르까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역시 발현악기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치터와 침발롬, 만돌린 그리고 발랄라이카같이 예사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민족적인 색채까지 띤 악기들이 총출동해 저마다 음색을 뽐낸다.
중요한 것은 현을 긋는 것이 아니라 튕기는데 있다. 그 경쾌한 탄력이 가져오는 긴장감 그리고 수학처럼 치밀하고 견고한 화성으로 쌓아 올린 바로크 음악의 화려한 경직성이 똑 떨어지는 일러스트를 닮은 영화 속 이미지에 섬세한 문양과 뚜렷한 질감을 불어넣는다. 때문에 데스플라가 작곡한 이 영화의 스코어는 묘사적이라는 인상이 짙다. 존 윌리엄스가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마법의 세계를 다채로운 멜로디로 묘사해냈던 것처럼 데스플라 역시 앤더슨 감독이 창조해낸 이 이상한 나라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음악으로 빚어내는데 많은 공을 들인다. 알프스 산자락에 자리 잡은 호텔의 고즈넉한 정경을 요들과 알파인 호른의 음색으로 소개하고, 호텔의 미스터리한 주인장 제로 무스타파의 용모를 그려내는 침발롬이 'Mr. Moustafa'에 고개를 내민다. 트레몰로로 연주하는 치터에 더해진 침발롬의 유머러스한 선율. 이국적이지만 그 국적을 추측하기엔 난감한 이 멜로디는 발칸 반도의 지형도를 헛갈리게 만드는 두 악기가 묘하게 얽혀있다. 치터 대신 발랄라이카를 내세운 구스타브의 짤막한 테마 'Overture: M. Gustave H' 역시 마찬가지. 마담 D와의 인연을 꺼내면서 침발롬과 발랄라이카의 음색을 엮어놓은 데스플라는 유능하면서도 속물적인 로맨티시스트 무슈 구스타브의 면모를 슬쩍 꼬집는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 중 시간적인 배경이 가장 멀리 있는 영화이니 만큼 록이나 재즈를 선곡하기엔 무리라는 것이 오리지널 스코어의 비중을 99퍼센트 가까이 늘렸을 테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도 그의 취향을 반영한 선곡이 하나 등장한다. 비발디의 소나타 삼중주 RV 82번을 독일의 기타 연주자 지그프리트 베렌트 Siegfried Behrend가 다시 편곡한 'Concerto for Lute and Plucked Strings'가 바로 그것. 영화 속에서 가장 밝은 멜로디일 이 곡은 맨들 빵집에서 일하는 아가사를 위한 테마곡이나 다름없다. 발현악기와 바로크 풍 음악에 대한 앤더슨 감독의 사랑은 스코어뿐만 아니라 선곡에서도 이토록 한결같다.
마담 D가 주검으로 발견되면서 어느새 추리 영화의 색채를 띄기 시작하는 음악엔 이제 긴장스러운 리듬이 슬슬 거든다. 달리는 기차의 움직임을 모사한 타악기의 리듬이 생생한 'Daylight Express to Lutz'부터 을씨년스러운 택시 밖 풍경이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를 연상시키는 'The Family Desgoffe und Taxis'까지 불길한 서스펜스의 선율이 차곡차곡 담긴다. 그리고 마담 D의 유언을 낭독하는 장례식 분위기를 우렁찬 팀파니와 장엄한 오르간으로 전하는 'Last Will and Testament'에서 무슈 구스타브와 제로의 모험은 마침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유언장을 둘러싼 음모가 더해지고,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는 와중에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영화에 출연하는 인물의 수와 비례하는 긴 사운드트랙 리스트가 이 영화에 음악이 얼마나 촘촘하게 박혀있는지 엿보게 한다. 매우 다채로워 보이지만, 사실 데스플라의 스코어는 영화 속에서 의외로 균질하게 들린다. 일부 스코어의 러닝 타임이 무척 짧고, 몇 가지 악기가 반복해서 등장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두 개의 중심 멜로디로 거의 대부분의 스코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변주라고 하기에도 어려운데, 테마를 이루는 선율의 가장 작은 단위인 라이트모티브(Leitmotiv)를 끄집어내 블록을 조립하듯 다양한 장면에 활용했기 때문이다. 마치 앤더슨 감독이 배우의 개성을 고려해 (일부러) 망가뜨린 캐릭터들처럼. 또 그것이 이 영화의 만만찮은 재미인 것처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음악에서 그런 인상이 극치에 달했던 순간 하나를 꼽는다면, 그레고리안 성가 스타일로 편곡한 'Canto at Gabelmeister's Peak'일 것이다. 데고프의 오른손 조플링의 눈을 피해 깊은 수도원에 두 사람이 잠입하는 장면에 흐르는 이 곡에서 데스플라는 가장 낯익은 선율에 가장 낯선 음색으로 아주 색다른 분위기를 꾀한다. 물론 앤더슨 감독이 정해놓은 큰 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는 스타일로. 그래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대한 첫인상은 고색창연한 벽지로 둘러싸인 방에 들어간 기분과 비슷했다. 특별한 클라이맥스 없이 영화나 음악이 거의 균질하게 보이고 또 들려서다. 그러나 영화에 반해 이 지경으로 글이 늘어나게 된 건, 뒤늦게 앨범을 접하면서 애초에 밋밋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실은 빈틈없이 치밀하게 계산된 결과이고, 한 번의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벽지의 무늬만큼이나 빽빽한 클라이맥스로 영화와 음악이 가득 차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스플라의 음악은 더욱 벽지 같다. 섬세한 문양과 화사한 색감의 디테일이 반짝이는. 하기야 예사롭지 않은 벽지의 무늬마저 눈여겨보게 만드는 것이 웨스 앤더슨의 영화의 매력이자,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미덕 아닌가. 그러고 보니 참 완벽한 궁합이다.
01 [01:12] S'Rothe-Zäuerli_ Öse Schuppel
02 [00:36] The Alpine Sudetenwaltz
03 [03:03] Mr. Moustafa
04 [00:30] Overture: M. Gustave H
05 [01:20] A Prayer for Madame D
06 [02:17] The New Lobby Boy
07 [02:52] Concerto for Lute and Plucked Strings I. Moderato_ Siegfried Behrend
08 [02:16] Daylight Express to Lutz
09 [00:32] Schloss Lutz Overture
10 [01:49] The Family Desgoffe und Taxis
11 [02:16] Last Will and Testament
12 [00:27] Up the Stairs / Down the Hall
13 [01:44] Night Train to Nebelsbad
14 [00:49] The Lutz Police Militia
15 [00:11] Check Point 19 Criminal Internment Camp Overture
16 [02:25] The Linden Tree_ Osipov State Russian Folk Orchestra, Vitaly Gnutov
17 [01:28] J.G. Jopling, Private Inquiry Agent
18 [01:32] A Dash of Salt(Ludwig's Theme)
19 [02:47] The Cold-Blooded Murder of Deputy Vilmos Kovacs
20 [02:12] Escape Concerto
21 [01:01] The War(Zero's Theme)
22 [01:32] No Safe-House
23 [02:21] The Society of the Crossed Keys
24 [01:15] M. Ivan
25 [00:30] Lot 117
26 [01:20] Third Class Carriage
27 [05:35] Canto at Gabelmeister's Peak
28 [05:18] A Troops Barracks(Requiem for the Grand Budapest)
29 [01:10] Cleared of All Charges
30 [01:26] The Mystical Union
31 [02:43] Kamarinskaya_ Osipov State Russian Folk Orchestra, Vitaly Gnutov
32 [03:21] Traditional Arrangement: "Moonsh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