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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Dec 17. 2015

토미타 이사오의 음반 두 장

[응답하라 1988]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이다 보니, 본방 시간을 맞추기 힘들어도 틈틈이 재방송을 챙겨보고 있다. 그리고 옛것을 보면서 추억에 잠기곤 한다. 블로그에 좀처럼 소개하지 않는 몇 장의 텔레비전 사운드트랙도 요 근래 부쩍 자주 손이 간다. 방송용 OST라고 해서 만듦새가 떨어지는 것은 아닐 테지만, 굳이 영화의 OST로 컬렉션 범위를 한정한 것은 텔레비전 드라마와 애니메이션까지 다룰 깜냥도, 여력도 안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고,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몇 달을 그 시간대에 묶이게 되는 마성 같은 연속극의 매력이 부담스러워 시작부터 아예 볼 엄두를 내지 못해서다. 음악적으로라면, 한정된 테마곡을 돌려쓰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기억하게 되는 멜로디에서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한 탓도 있다. 그래서 내가 가진 텔레비전 사운드트랙은 10장이 채 안되고, 그마저도 '옛날 옛적 고리짝'같은 것들뿐이다. 하여, 생각난 김에 오랜만에 꺼내본 토미타 이사오(冨田勲)의 음반 두 장. 국내에는 <밀림의 왕자 레오>로 소개된 <ジャングル大帝(정글대제)> 그리고 <사파이어 왕자>로 알려진 <リボンの騎士(리본의 기사)>다.


토미타 이사오의 <밀림의 왕자 레오> 그리고 <사파이어 왕자>


미야자키 하야오와 히사이시 조 콤비 이전에 일본 애니메이션의 아버지라 일컫는 데츠카 오사무(手塚治虫)와 일찌감치 짝을 이뤘던 토미타 이사오는 국내엔 전자음악쪽이 주로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시사이저 연주자로서 이사오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한 것이 74년에 발표한 앨범 [月の光(달빛)]이기 때문. 1970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에서 접한 월터 카를로스의 앨범을 듣고 무그 신시사이저 사운드에 매료된 그는 온갖 어려움을 딛고 직접 수입한 신시사이저로 3년 뒤 [달빛]을 발표했고, 일본에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던 이 앨범이 미국에 소개된 후 빌보드 차트에 오르는 동시에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에미상에 노미네이트 되면서 세계적인 음악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 그러나 음악가로서 그의 커리어는 이미 53년 라디오 드라마 음악부터 시작됐고, 텔레비전으로 진출한 이후 다큐멘터리, 시대극, 드라마, 특촬, 시사, 교양, 예능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분야에 걸쳐 TV 프로그램 음악을 작곡했다. 뿐만 아니라 58년부터 시작한 영화음악 역시 방대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한다. 신시사이저라는 새로운 기술이자 악기가 그의 작곡 활동에 날개를 달아준 셈. 그러나 <밀림의 왕자 레오>와 <사파이어 왕자>는 신시사이저를 접하기 이전 토미타 이사오의 음악 세계가 오롯이 담겼다.  



1965년 작인 <밀림의 왕자 레오>는 악기 고유의 음색에 대한 관심과 어린이 합창단을 이끌었던 그의 이력이 반영된 음악처럼 들린다. 저예산이나 다름없는 만화영화의 사운드트랙이지만, '어린이를 위한 교향시(子どものための交響詩)'라는 타이틀을 붙인 이 앨범의 첫 트랙은 음악을 소개하기 앞서 성우의 중후한 목소리로 작품에 사용된 악기의 음색을 하나하나 소개한다. <문라이즈 킹덤>의 사운드트랙에 삽입된 레오나드 번스타인의 'The Young Person's Guide To The Orchestra, Op. 34'가 이와 비근한 사례. 그러나 이 친절한 설명 뒤 곧바로 시작되는 오프닝 타이틀곡은 시대를 뛰어넘는 고급진 멜로디로 귀를 놀래킨다. 주변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한 토미타 이사오가 구사하는 초기 사운드가 '교향시'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나 허풍이 아님을 그 화려한 선율로 증명하기 때문이다. 우렁찬 팀파니와 우아한 관악기 그리고 아프리카의 색채를 살짝 가미한 이국적인 타악기들이 어우러진 테마곡이 데츠카 오사무의 단순한 그림체에 깊이와 생동감을 더했다는 인상을 준다. 턱없이 적은 예산으로 후배 애니메이터들의 빈축을 샀던 오사무의 만화에 비해 일본 필하모니 교향악단과 일본 합창협회를 동원한 음악의 규모는 데츠카 오사무가 애니메이션의 모델이자 경쟁자로 삼았던 디즈니의 음악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오사무 프로덕션의 다섯 번째 작품인 <사파이어 왕자>는 주로 소년을 대상으로 했던 만화영화에 처음으로 소녀들의 취향을 반영한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66년 요코야마 미스테루(横山光輝)의 <요술공주 세리(魔法使いサリー)>와 함께 소녀들을 위한 만화영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한 작품으로 꼽힌다. 우리의 여성국극처럼 여성 멤버로만 이루어진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단(宝塜歌劇)을 연상케하는 이 애니메이션을 위해 토미타 이사오는 스코어뿐만 아니라 많은 노래를 작곡했다. 애니메이션에 뮤지컬적인 요소를 끌어들인 셈인데, 이 역시 디즈니 음악의 영향으로 보인다. 특히 오프닝 크레디트를 장식하는 주제가 'リボンの騎士(리본의 기사)'는 전형적인 미키마우징 기법이 돋보인다. 화면에 차례로 등장하는 종과 나팔, 피리 소리를 음악적으로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이라면 디즈니의 음악이 전통적인 오케스트라 스코어를 구사했던 것에 반해 토미타 이사오는 대중음악의 감각 역시 불어넣었다는 것. 이제는 할머니가 된 마에카와 요코(前川陽子)의 앳된 목소리엔 일본 가요 특유의 서정이 슬쩍 배어있다.


이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던 67년 당시 음반 발매를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음악을 녹음한 마스터 테이프가 소실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 앨범에 수록된 음악들의 음질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방송용 테이프의 음향 트랙에 남은 부분을 그대로 음반에 담았기 때문. 비록 투박한 흔적일 뿐이지만 일본이 워낙 OST를 좋아하는 나라라 이런 음질로도 음반 제작을 충분히 기획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참고로 국내 방영분에서 대부분의 주제가는 번안해 사용되었지만, 편곡은 누가 맡았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 귀에 가장 친숙할 마지막 주제가 버전을 작곡한 음악가는 마상원. 그리운 이름이다. 정민섭과 함께 마상원의 만화 주제가들이 제대로 된 음반 한 장을 여태껏 남기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 이제 그 이름들을 기억하는 사람도 하나둘 사라져갈 텐데.


> 국내 방영 버전 주제가 및 삽입곡 들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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