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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Apr 08. 2016

재즈와 푸가로 빚어낸 스릴러

리플리, 1999

<잉글리쉬 페이션트English Patient>가 불어난 제작비로 난항을 겪고 있을 무렵, 프로듀서는 안소니 밍겔라Anthony Minghella 감독을 잠시 불러들였다. 제작사가 오랫동안 공을 들여 마침내 판권을 얻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에 대한 시나리오 작업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르네 클레망Rene Clement의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로 오래전 영화화된 원작 소설을 흥미롭게 읽었던 밍겔라는 각색을 위해 다시 책을 펼쳐 들었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생각에 잠겼다. 하이스미스가 소설 속에 그려낸 인물을 음악이라는 장치를 이용해 좀 더 강렬하고 다이내믹한 캐릭터로 되살려 낼 수 있으리라고. 또한 시나리오 각색뿐 아니라 아예 자신이 감독을 맡아 그런 영화로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제작이 재개되면서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는 당분간 보류됐지만, 그 사이 밍겔라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었고, 69회 아카데미 수상식을 휩쓸면서 마음에 담아두었던 차기작을 비교적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제작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다. 자신과 동고동락하며 최고의 순간을 함께 맞이했던 영화음악가 가브리엘 야레Gabriel Yared, 그리고 내로라하는 음악 전문가들과 팀을 이뤄서.    


<리플리>가 음악에 적잖이 의지했음은 오프닝 크레딧부터 느껴진다. 야레가 멜로디를, 밍겔라가 직접 노랫말을 붙인 시니드 오코너Senead O'Conner의 'Lullaby For Cain'으로 운을 뗀 뒤 감독의 이름이 오프닝 크레딧의 마지막 자막으로 떠오를 때까지 무려 7곡의 음악이 초반에 몽땅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톰 리플리의 직업과 취향과 성격 그리고 그가 이탈리아로 떠나게 된 경위를 클래식과 재즈의 멜로디로 촘촘히 엮어가면서. 고전음악에 대한 톰의 남다른 애정이 상류사회를 향한 그의 동경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디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와 찰리 파커Charlie Parker의 레코드로 재즈를 학습하는 모습엔 그의 주도면밀한 성격이 슬쩍 엿보인다. 어디 그 뿐인가. 쳇 베이커Chet Baker의 노래를 들으며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는 리플리의 푸념엔 공공연하게 동성애자라는 풍문이 돌았던 쳇 베이커를 통해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넌지시 암시한다. 


50년대라는 시간을, 이탈리아의 미국인을, 무엇보다 자유분방하고 충동적인 디키 그린리프라는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안소니 밍겔라는 재즈, 그중에서도 즉흥연주가 돋보이는 비밥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러나 디키는 톰이 예상했던 것보다 활력이 넘쳤고 또 거칠었다. 비밥에서 비롯된 하드밥은 음악 수퍼바이저가 내놓은 묘책이었을 것이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난감하게 만드는 하드밥의 리듬은 까다롭고 와일드한 연주로 대중을 당황시켰으니까. 변덕스럽고 불 같은 성격의 디키처럼. 재즈 트럼펫터 가이 베이커Guy Baker를 중심으로 다섯 명의 연주자로 꾸려진 퀸텟은 보비 티몬스Bobby Timons의 'Moanin'과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의 'Pent-up House' 같은 하드밥의 명곡들을 새로이 연주해 영화음악의 자장 안으로 슬그머니 끌어들인다.


<리플리>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ㅣ Sony Classical(1999)

  

그러나 안소니 밍겔라 감독은 그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 디키와 톰을 연기한 두 배우에게 각각 재즈곡을 직접 부르게 한 것이다. 56년 레나토 카르조네Renato Carsone가 발표해 나폴리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했던 스윙 재즈 'Tu Vuo' Fa L'Americano'를 부르는 배우 주드 로의 모습은 연기가 아니라 디키 그 자체로 그를 바라보게 만들었던 일등공신. 시간과 공간적인 배경뿐만 아니라 상황과 캐릭터까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영화음악 최고의 선곡 중 하나다. 그렇다면 톰을 연기한 맷 데이먼에게는 어떤 곡을 맡겼을까. 많은 가수들에 의해 수차례 불려졌던 'My Funny Valentine'. 그중에서도 쳇 베이커의 읊조리는 보컬을 모사한 리플리의 버전은 하드밥의 대척점에 있던 쿨 재즈의 스타일을 따른다. 은밀한 사랑의 고백, 혹은 쓸쓸한 심경의 토로처럼 들리는 그의 서늘한 음성은 화끈한 디키와 대조를 이루고, 끝없이 펼쳐질 것만 같았던 재즈의 향연은 산레모의 바다 한가운데서 디키가 살해된 후 영화에서 거의 종적을 감춘다.

 

재즈 마니아인 디키가 서툰 색소폰 연주자였던 것과 달리 톰은 능숙한 피아니스트이자 클래식 애호가였다. 자연 톰 리플리를 위한 선곡 역시 고전음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사운드트랙 앨범에 실리진 못했지만, 영화의 초반부를 장식하는 클래식 음악은 리플리의 어두운 욕망을 비춘다. 베토벤의 피아노 사중주곡이 연주되는 무대를 훔쳐보던 톰은 인기척을 느끼자 곧바로 커튼 뒤에 몸을 숨기고, 아무도 없는 컴컴한 극장에서 그가 연주하던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은 경비원의 방해로 중단된다. 안소니 밍겔라의 말을 빌면, 리플리를 위해 그가 염두에 둔 음악의 스타일은 푸가(Fugue). 다른 음악가보다 바흐의 곡이 많이 사용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정교한 푸가 역시 재즈와 마찬가지로 즉흥연주의 요소가 들어있다는 점. 연주자의 기량을 알아보기 위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던 이 즉흥연주를 바흐는 프로이센의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 앞에서 선보이고 푸가의 초기 형태를 완성시켰다. 영화에선 리플리의 우발적인 살인이 그의 천부적인 재능에 의해 완전범죄로 귀결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우연한 범행이었지만 그를 은폐하는 리플리의 솜씨는 치밀하고 대담했던 것이다. 클래식이 강한 인상으로 남은 장면은 또 있다. 메리디스와 함께 극장을 찾은 리플리가 차이코프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Eugene Onegin]을 보면서 자신의 범죄를 회상하는 부분. 절친한 친구인 렌스키와의 뜻하지 않은 결투로 결국 그를 살해한 오네긴은 돌이킬 수 없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후회와 눈물로 남은 세월을 보내면서. 극 중 극의 형태로 삽입된 [예브게니 오네긴]이라는 오페라와 차이코프스키라는 작곡가로 암유된 리플리의 삶은 그렇게 그늘져 있다.


재즈와 클래식을 통해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구축했음에도, 밍겔라 감독은 가브리엘 야레와 함께 오리지널 스코어 작업에 한 번 더 공을 들였다. 살의와 긴장 그리고 불안감으로 가득 찬 스릴러의 향기를 불어넣기 위해. 오랜 여행 끝에 리플리가 당도한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 몽지벨로의 정경을 묘사하는 'Italia'에는 이국의 나른한 선율이 귀를 간지럽힌다. 몽환적인 멜로디와 그 공간을 환기시키는 만돌린과 아코디언의 음색으로. 리듬 악기를 배제하고 대부분 목관과 현악기에 의지한 야레의 스코어는 신비로운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그중 백미는 'Ripley'. 피아노 뚜껑이 서서히 닫히며 표면에 반사된 리플리의 얼굴이 분열하는 순간을 음험하고 미스터리 한 선율로 담아낼 때 그간의 행적을 숨죽이며 지켜본 우리는 톰의 본모습을 더욱 헤아리지 못한다. 소심한 듯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대담하고, 교활한 동시에 때때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그의 진심을. 그리고 자신의 범죄를 덮기 위해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는 그 어두운 본성을. 그러나 두 가지는 확실하다. 톰은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물리적인 형벌은 피했지만,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혀 영원히 괴로워하게 될 것이라는 걸. 그리고 앞으로 그 어둡고 습한 감옥의 열쇠를 누구에게도 맡기지 못한 채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리라는 걸.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원작 소설의 마지막 구절을 그렇게 썼다. '리플리가 도착하는 선착장마다 그는 앞으로도 경찰의 환영을 보게 될 것'이라고. 침침한 엔딩 타이틀에 흐르는 존 마틴John Martyn의 재즈곡 'You Don't Know What Love Is'는 원한 때문에 차마 눈을 감지 못한 디키가 톰에게 내리는 저주처럼 들린다. 영원히 풀리지도, 풀 수도 없는.




01 [03:03] Tu Vuo' Fa L'Americano_ Matt Damon+Jude Law+Fiorello

02 [02:34] My Funny Valentine_ Matt Damon

03 [01:40] Italia

04 [03:31] Lullaby For Cain_ Sinead O'Connor

05 [04:47] Crazy Tom

06 [02:54] Ko-Ko_ Charlie Parker

07 [04:48] Nature Boy_ Miles Davis

08 [02:26] Mischief

09 [03:29] Ripley

10 [02:39] Pent-up House_ The Guy Baker International Quartet

11 [03:16] Guaglione_ Marino Marini

12 [04:16] Moanin'_ The Guy Baker International Quartet

13 [01:58] Proust

14 [03:41] Four_ The Guy Baker International Quartet

15 [02:49] Promise

16 [02:45] The Champ_ Dizzy Gillespie

17 [04:49] Syncopes

18 [02:55] Stabat Mater(excerpt)_ Antonio Vivaldi

19 [05:23] You Don't Know What Love Is_ John Marty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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